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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늦은 봄밤 포장마차에서 눈망울 선한 벗들과 술을 마셨다. 모처럼 다리가 조금 풀리고, 눈동자마저 풀리도록 마시고는 캄캄한 저수지 둑길을 걸어 산중의 집으로 오다 보았다. 저도 목이 컬컬했는지 물 마시러 내려온 고라니와 딱 마주친 것이다. 저나 나나 어찌할 겨를도 없이 멀뚱멀뚱 어둠 속에 빛나는, 하지만 잔뜩 겁을 먹은 두 눈을 서로 마주보았다.
“야, 이놈아. 술 한잔 사주랴?”
얼떨결에 말을 걸고도 싶었지만, 고라니는 슬그머니 눈길을 거두더니 돌아서서 냅다 튀는 것이었다.
“야, 인마. 같이 가자, 같이 가!”
갑자기 외로워져 악을 쓰며 어둠 속의 꽁무니를 향해 돌멩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몇 발자국 따라가지도 못하고 내가 먼저 고꾸라지고 말았다. 저수지의 검푸른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소쩍새가 울고, 깨진 무르팍에는 알코올 농도 0.2의 탁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비릿한 봄밤의 냄새, 피 냄새. 술이 확 깨는 것이었다. 이를 어찌하랴? 저수지 둑길에 주저앉아 캄캄한 산으로 저 홀로 도망친 착하디 착한 고라니를 생각했다.
‘그래, 혼비백산한 저 고라니처럼 내 삶은 진정으로 비겁한 적이 없었어. 돌아서서, 돌아서서 뛰면서 한 번도 목 놓아 울어본 적이 없으니, 길을 잃고도 당당한 척 그 얼마나 힘들었겠어? 저 고라니처럼 비겁하다는 것은 비열함이 아니라 단지 겁이 많다는 것일 뿐. 겁도 없이 어찌 삶을 되새길 줄 알겠는가? 하루 종일 풀만 먹고 밤새 갈증이 나도록 씹고 또 씹어 보는 그 고독한 되새김질이 없었어.’
그렇다. 초식동물인 고라니나 노루 혹은 소처럼 우리는 되새김질의 주문이 약하고 참회가 부족해 나날이 피가 탁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잘못된 길이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뱉어보고 씹어보는 되새김질을 통해 비로소 다시 길을 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우왕좌왕, 횡설수설…, 그 고통스러운 발자국들이 모여 화석처럼 길이 되고, 몸속의 구절양장이 곧 우리가 가고 또 가야 할 길인 것이다. 초식동물들처럼 살과 피와 뼈, 가죽과 내장마저 다 내주고도 후회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으로 비겁한 자만이 고라니나 소처럼 눈망울이 선할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비겁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돌아볼 수 없으니, 날마다 당당한 척 고통스러운 이들의 충혈된 눈빛, 그 비애가 가슴을 친다. 비열한 것은 죄가 될 수 있으나 비겁한 것은 너무 인간적이어서 죄가 아니다. 겁이 많은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 노심초사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며 오히려 타인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가?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 이제 비겁하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야 한다. 따지고 보면 그 강박관념이 싸움을 낳고 전쟁을 낳는 것이다.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 그 진리의 실체는 사실 강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없이 약하고, 비겁하고, 부끄러워 자신을 끝없이 들여다보고 날마다 반성하는 이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눈망울이 선한 초식동물은 죽어서도 아낌없이 몸을 다 내주고, 마침내 썩을 몸 하나 없어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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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