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1,original,left[/SET_IMAGE]지난해부터 ‘과거사’라는 단어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이 단어에 가장 흔히 덧붙여지는 말은 ‘진상규명’이다. ‘과거사 진상규명’, 이 표현에 함축돼 있는 뜻은 과거의 일 중 어떤 것의 실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거나 왜곡되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제기될 때마다 많은 논란을 야기한다. 진상규명에 대해 탐탁해 하지 않는 쪽에서는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있을 것인가, 이제 그만 미래로 나아가자’고 호소하거나 ‘권력의 횡포 또는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과거를 바로 세우지 않고는 참된 화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없으며, 과거 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정당한 책무’라고 주장한다.
혹시 용어 때문에 이런 엇갈린 주장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과거사’라는 말은 우리말의 용법상 어쩔 수 없는 것이거나, 그냥 덮어두어야 할 것이라는 어감을 갖고 있다. ‘과거지사’라는 말이 그렇고, 대중가요의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제목이 그렇다. 이런 의미로 ‘과거’는 자꾸 들춰봐야 되담을 수 없는 엎지른 물과 같은 것이어서 합리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과거사’를 ‘역사’라는 말로 바꾸어보자. 의미는 달라진다. 역사는 바로 기록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우리는 한결같이 분노하고 또 그 분노의 정의로움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분노와 분노의 정의감이 이중적인 것은 아닐까?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가 한창 이슈로 떠올랐던 지난 4월17일 미국의 유명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게재한 기사는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일본 새(역사) 교과서, 부상하는 민족주의 교육”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한·중·일 역사 교과서를 비교하면서 일본의 교과서가 더 균형적이라는 시각을 드러내 보인다. 적어도 기사 중의 한 문장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1980년대 말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는 많이 향상되었지만, 그럼에도 일본의 식민지배자들에게 협조한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은 금기로 남아 있다.” 이 기사를 쓴 오니시 노리미쓰 기자가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국내 언론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런 폭로만으로 그 기사를 무시하고 안심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이 기사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너희의 부끄러운 역사, 즉 친일파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당혹스러워 해야 할 질문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왜 그토록 관대하고, 정치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자는 것에는 또 왜 그다지도 완강하게 저항하는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핏대를 올릴 때와 우리의 과거사 진상규명에 반대할 때의 논리와 근거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 설명할 수 없는 이중성을 극복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참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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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