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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그곳이 바로 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시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는데요, 우리는 어디론가 가야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 도착하고 있는 중이라 했지요.
또한 우리의 속담에 ‘대문 밖이 저승’이라는 말도 있지요.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바로 코앞이고, 시공을 넘어 어제와 오늘과 내일, 그리고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제의 일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오늘을 망치고, 내일의 일에만 매달리다보니 오늘이 자학의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곳’에 너무 집착해 바로 ‘이곳’에서 스스로 불행하니 ‘그곳’은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극락이나 천국이요, 지금 ‘이곳’은 온통 지옥일 뿐이지요.
그러나 살다보면 나희덕 시인의 시처럼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가는’ 날들이 있지요.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한 후회의 날들이
영안실 혹은 상가의 조등(弔燈)처럼
쓸쓸하게 일렁이겠지요
조등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 나희덕의 시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중에서
그렇지요. ‘그가 너무 일찍’ 목련꽃을 피워 올렸으니, 나는 언제나 한 발 늦을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삶은 죽음의 연속이며, 꽃과 잎이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처럼 서로 달리 피고 지는 일이니 이를 또 어찌합니까. 다만 ‘너무 늦게 온 이들끼리’ 술잔을 주고받아야겠지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날마다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한 날들이 자꾸만 등을 밀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갈대처럼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나아가는 모습이 살아있음의 한바탕 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신명나는 춤입니다. 울고 웃으며 온몸으로 추는 한바탕 이승의 춤.
지금, 바로 이곳에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마다 씨앗이 움트고, 새들이 지저귑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몸은 그대로 들숨 날숨을 쉬고, 온몸 구석구석에 뜨거운 피가 돌며 천국의 문을 환하게 열어젖히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언제나 너무 일찍 도착했으나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원통할 뿐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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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