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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지리산에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되도록 책이나 신문 등을 읽지 않으려 애를 썼지요.
명색이 시인이라는 작자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게 그 무슨 자랑이겠습니까. 하지만 그간 읽고 배운 것만을 갖고서도 나의 삶이 어떻게 그것들을 소화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요.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만도 못한 소설과 시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 자문하고 자문했습니다. 자위행위 수준의 수많은 책들 그 자체가 애꿎은 나무들만 죽이는 것이려니 생각했지요. 산중의 겨울밤, 내 한 몸 춥지 않으려 땔나무를 구하고 그 나무로 군불을 지피다가도 문득 뒤통수를 치는 자괴감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마저도 내 자신의 치열하지 못한 창작행위에 대한 반성이며, 오히려 산중에 사는 이들의 교만에 가까운 발언인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다만, 독서나 창작보다는 새롭게 세상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는 게 옳은 말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나무의 기억은 어떠할까요. 그리고 수억만 년 된 돌의 기억과 그 돌로 만든 천년고찰 3층 석탑의 기억….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또한 무언가 부끄럽지 않은지요.
그리하여 나는 일단 오래된 나무를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아무래도 나무는 백과사전이지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이미 백과사전인 나무의 침묵, 그 묵언의 소리를 한번이라도 들어보려는 나의 시도는 여전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 되기 십상이지만 말입니다.
틈이 날 때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경남 남해군 창선면의 500년 된 왕후박나무를 찾고, 전남 송광사의 1000년 된 쌍향수, 지리산 뱀사골 와운리의 천년송 등 이 땅 도처에 살아 있는 신목(神木)들을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이지요.
그 나무들의 온몸에 입력되거나 활자화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시절들을 엿보며, 그 뿌리를 베개 삼아 하룻밤이라도 잠을 자는 날이면 온몸에 수많은 나이테가 들어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나무의 말씀을 단 하나도 들을 수 없고, 그러니 당연히 쓰거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 나무의 눈으로 한순간이라도 주변 풍경을 둘러볼 뿐이지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삼세의 풍경과 시간과 사건을 나무처럼 말없이 상상하며 내 몸에 입력해 보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 유일한 책은 누가 뭐래도 나무입니다. 그것도 되도록 오래된 나무, 신목이지요. 늦가을의 노란 은행나무 잎은 그대로 수천 년간 누군가에게 배달된,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엽서요, 나뭇가지는 집배원의 손이며, 몸통은 그대로 우체국입니다.
나무는 이미 살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집이자 책이지만, 죽어서도 마침내 집이 되고 책이 됩니다.
[RIGHT]<시인>[/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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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