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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집 ‘피아산방’은 온통 물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당 바로 앞으로 흐르는 아주 작은 계곡물은 밤낮 없이 흥얼거리며 섬진강으로 가지요. 내가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때, 잠을 자거나 외출했을 때에도 서로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부르며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행여 비라도 오면 빗소리와 함께 삼중창의 화음을 이루지요. 처음엔 빗소리와 폭포 소리, 계곡물 소리를 구분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오래 만나다보면 쌍둥이 친구의 얼굴을 구분해내듯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집 앞에서 흐르는 계곡물과 함께 물의 여행을 시작해 볼까요.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왕시루봉 아래서 출발한 물의 기나긴 여행은 이미 신갈나무와 원추리꽃을 스쳐지나 우리 집 뒷산의 소나무와 밤나무 등 온갖 식물과 바위들을 스쳐 마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한 줌 떠서 마셔 보면 수많은 꽃이나 약초 뿌리의 향기가 나지요. 이 계곡물은 내가 일용할 양식을 조금 나눠주고 다시 흘러갑니다. 피아골 연곡사에서 달려온 친구들과 어울려 얼싸안고 한바탕 춤을 추다가 그곳에서 등산객을 만나면 그들의 몸을 어루만져 식혀 주고, 행여 그들이 오물을 버리면 그것까지 온몸으로 껴안아 금방 깨끗하게 정화시키며 흘러갑니다.
착한 농부의 발길을 따라가 벼이삭을 패 주고, 논에서 나오는 길에 잠시 마주친 개구리의 커다란 두 눈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기도 하지요. 그때 개구리의 눈에 비친 물은 하늘의 구름이기도 하고 잘 익은 벼이삭이거나 푸른 산의 모습이지요.
자신의 몸을 내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흐르다가 만나는 모든 것을 거울처럼 받아들이지요. 그것이 바로 물의 마음이자 물의 사랑법이지요. 그렇게 흘러간 계곡물은 이제 연곡천이라는 이름의 시냇물 시절을 지나 섬진강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한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섬진강 100리길을 순식간에 달리는 동안 강물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만나는 강변의 모든 풍경을 온몸에 담으며 흘러갑니다. 이따금 백사장에서 낮잠을 자다가 섬진강의 명물 재첩에 젖을 물리기도 하지만 마침내 남해에 다다른 강물은 어느새 바닷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동안 만난 풀이며 나무며 바위며 버들치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는 곳을 달리하고 사는 방법이 달라도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지요. 그리하여 물의 여행은 바다에서 완성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의 입구입니다. 첫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사랑이 끝난 뒤에 다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물도 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구름이 됩니다. 바람에 몸을 실어 맨 처음 흐르던 곳으로 날아가 마침내 수직하강을 합니다. 바닷물과 구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침내 비의 이름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지요.
나는 오늘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 먼 길을 떠나는 계곡물 소리를 듣습니다. 물의 사랑가를 들으며, 내가 만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나도 이제 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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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