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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지리산은 밤꽃 향기가 기습적으로 점령하는 바람에 온 산이 환하다 못해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과부들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엄동설한을 견딜 수는 있어도, 밤마다 봉창으로 밤꽃 냄새가 스며드는 오뉴월에는 참으로 수절하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밤꽃 피는 유월은 불륜(不倫)의 달인 것이지요.
불륜이란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를 벗어난 것으로 대개 ‘윤리에서 벗어난 남녀관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밤꽃 피는 유월에 문득 생각해보건대, 불륜도 참으로 여러 가지인 것 같습니다.
6·25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야말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극단적으로 넘어선 불륜 중의 불륜이 아니겠는지요. 그리하여 요즘 지리산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온 산천을 뒤덮는 이 비릿한 밤꽃 냄새는 남자의 정액 냄새가 아니라 난리통에 처절하게 죽어간 부모 형제의 피 냄새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남녀관계의 불륜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입장이 다르거나 대개가 여성비하적 혹은 성의 불평등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이 지독한 밤꽃 냄새로부터 한 통의 우편물을 받았습니다. 마산교도소의 죽마고우가 보내온 눈물겨운 편지였지요. 요약하자면 친구의 편지는 아내의 ‘불륜’ 때문에 빚어진 기구한 사연이었습니다. 풍문에 대구에선가 어디선가 잘살고 있다던 나의 친우는 그 사이 12년 형을 선고받은 살인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서울을 떠나 지리산에 깃들어 무심하게 사는 동안 친우는 16척 담장 안에서 6년째 참회의 복역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그의 편지글 중 ‘나름대로 열심히 살던 중 마누라의 바람으로 인하여 한 사람의 목숨을 염(殮)하고 이곳에 왔다네’라는 구절에서 숨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목숨을 염하고’의 ‘염’자가 송곳처럼 나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지요. 아내의 바람으로 인해 홧김에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인데, 그 피해자가 아내인지 정부인지는 편지 내용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답장을 보내며 그 사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지금도 교도소에서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그를 생각하면 이 밤꽃 향기마저도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그도 어쩌면 교도소 담장을 넘어오는 이 밤꽃 냄새를 맡으며 지난날의 죄와 아내라는 이승의 악연을 떠올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망자의 극락왕생을 빌며 불법에 귀의하여 ‘교도소를 절이라 생각하고, 동료 죄수를 도반이라 생각하며 수행 중’이라니 이 얼마나 고맙고도 다행스런 일인지요.
밤꽃 피는 오뉴월에 생각해봅니다. 한국전쟁과 같은 ‘민족적인 불륜’과 가정은 파괴되고 당사자들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남녀의 불륜’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어디에서 무엇으로 서야 하겠는지요. 지리산의 밤꽃 향기가 던져주는 이 ‘불륜’이라는 화두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여 인생의 끝없는 ‘불무장등(不無長嶝)'은 계속되는 게 아니겠는지요.
[RIGHT]이원규(시인)[/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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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