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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의 마고실, 아주 작은 강마을에 으름덩굴 한 그루가 살고 있습니다.
깊은 계곡 주변에서나 덩굴로 자라는 으름(어름)나무가 바로 우리집 마당에 푸른 파라솔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지요. 지리산에 들어와 다섯 번째 사는 집 마당에 꽃도 좋고 향기도 좋고 그늘마저 좋은 으름나무가 아침저녁으로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의 백 살이 넘은 감나무, 피아골 조동의 대나무와 백일홍, 실상사 지혜방 봉창 너머의 쌍 감나무, 칠선계곡 금계리의 살구나무와 매화나무. 그동안 나의 스승은 바로 이 나무들이었습니다.
마고실에 와서도 이 으름나무를 새 스승으로 삼으니 한 나무 아래 사흘을 머물지 말라는 ‘삼일수하의 경계’도 어느새 갈등 밖의 일입니다.
으름덩굴을 어름나무라고도 부르는데, 나는 그냥 이 나무의 열매가 여름을 보내며 가을을 맞으면서도 쩍 벌어진 입속에 하얀 얼음을 물고 있는 듯해서 ‘얼음’나무라고 부릅니다. 봄이면 연둣빛 잎사귀들이 올망졸망 갓난애의 다섯 손가락을 내밀어 내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고, 보랏빛 꽃송이 송이들의 그 향기 또한 나를 마취시켜놓고는 돌담을 넘어 섬진강에 몸을 섞습니다. 요즘 내가 가장 오래 지켜본 나무가 바로 이 으름나무이며, 입장을 바꿔 나의 표정을 가장 오래 훔쳐본 것도 바로 이 으름나무입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집주인은 말을 하시지 못하는 할아버지였는데, 이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소개된 옛 마을의 계곡에서 캐와 마당에 심은 것이라 합니다. 마당 중간에 어름나무를 심고 기둥을 세워 우산살처럼 엮어놓으니 마침내 푸르디푸른 파라솔이 된 것이지요.
그늘 아래 대나무 평상을 놓고 며칠 전 구례 장날에 사온 모기장까지 쳐놓았으니 이제 무더운 여름 걱정은 남의 일입니다.
모깃불이나 에프킬라로 모기를 죽이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그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방안의 모기장과 평상의 모기장 둘이면 그만이지요.
이는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포마다 바람이 숭숭,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의 소통입니다.
아내는 도회지에 일보러 가고, 월하미인으로 불리는 으름나무 푸른 그늘 아래 누워 모처럼 낮잠을 즐기려는데,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모기였지요.
한낮인데도 그늘을 찾아온 모기 한 마리가 모기장 밖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가엾은 것 하고 여유를 부리며 다시 눈을 감으려다 순간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실 모기는 바깥에서 자유로운데, 오히려 모기장 속에 갇힌 것은 바로 나였던 것이지요. 허허허, 나도 그만 벌떡 일어나 웃고, 모기도 웃는 것만 같습니다.
유유히 돌담을 넘어가던 도둑고양이도 웃고, 아직 덜 익은 으름나무 푸른 열매 ‘조선 바나나’들도 키득키득 웃는 늦여름 오후입니다.
[RIGHT]<시인>[/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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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