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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토요일 오후. 침통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약간의 두려움과 대견함 그리고 뿌듯함이 뒤섞여 물결치는 이 기분. 침술봉사를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이런 감정은 지금도 매한가지다.
매주 토요일마다 양로원에서 침술봉사를 한 지도 어느새 3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야 진정한 봉사자가 된 기분도 든다. 하지만 매주 집을 나서는 나를 두고 아직도 아내는 “조심해서 해요, 제발…”이라는 말과 함께 얼굴 가득 걱정을 담아낸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1년 정도 배운 침술로 봉사를 하는 내가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2000년 7월에 장편소설을 발표한 후 통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쓴 것이라면 고작 단편 몇 편.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것이 침술이었는데 봉사로까지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중국까지 가서 해부 연수도 받고, ‘동의보감’과 ‘침구경험방’ 등 침술에 필요한 고서들을 탐독하는가 하면, 배운 것을 가르치기 위해 문화센터에 강의도 나간다.
내가 침술에 이토록 빠져드는 것은 침술학교를 수료하기 전에 거치는 임상실습에서의 경험 때문이리라. 중풍환자들이 기거하는 복지관에서 내가 맡은 임상환자는 오른쪽 수족이 마비된 70대 할아버지였다. 오른쪽이 싸늘하게 마비돼 전혀 가망이 없을 것 같은 환자에게 등에 침을 놓는 방법으로 독맥과 방광선을 4개월 동안 매주 풀어준 결과, 오른쪽 수족에 온기가 돌고 감각을 느끼기 시작한 경험은 나를 침술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후 가까운 복지관을 정해 지금까지 침술을潁?한 것도 임상실습을 통해 얻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고, 고서를 파고들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 다니는 복지관엔 단골(?) 할머니만도 20명이나 된다. 좌골신경통을 앓는 할머니 한 분은 고통이 심할 때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고통을 참기 위해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는다고 했다. 빨리 데려가지 않는 저승사자가 원망스럽다며 나의 손을 꼭 쥐고 침을 놓아달라는 할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적도 있다. 그날 할머니의 기력이 너무 없어 침을 놓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두어 군데 뜸을 뜨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음 주에 복지관을 찾았을 때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다른 할머니로부터 먼 길을 떠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손을 꼭 쥐고 부탁하던 할머니의 간절함을 뿌리치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침술봉사는 이런 아쉬움과 뿌듯함이 교감하면서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하는 것 같다.
침을 맞고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어린 아기들이 젖 대신 먹는 분유를 타서 주는 할머니, 쌈지에서 꺼낸 사탕을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 침을 한 군데 더 놓아달라며 떼를 쓰던 할머니, 이 분들을 생각하면 토요일이 마냥 기다려진다.
팔순이 지난 할머니를 치료하다 보면 세상의 허무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기저기 아픈 곳만 늘어나는 초라한 삶의 흔적들을 만지다 보면, 일상의 하찮은 일에 매달려 스트레스를 받는 나의 어리석음도 보인다. 봉사는 그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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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