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보면 문신(文身)이 유행이다. 스포츠스타 팔뚝에, 가수 얼굴에, 젊은이 손목에 문신이 있다. 목욕탕에서도 문신한 사람들이 곧잘 눈에 띈다. 물론 거의가 젊은이들이다. ‘부모가 주신 몸에 어떤 흠을 내도 안 된다. `문신은 깡패들이나 한다’는 의식들이 엷어지고 있음이다. 우리나라에도 문신을 그려넣는 타투이스트(문신예술가)가 1000여 명이나 되고 문신을 지닌 인구가 5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물론 옷을 들추고 신체 곳곳을 일일이 살펴 헤아리지 않은 이상 정확한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 문신예술가를 자처하는 30대가 ‘나는 문신할 권리를 갖는다’며 대학로에서 정부의 규제에 항의하는 행위극을 가졌다. 현행법상 문신시술은 유사 의료행위로 처벌받고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경우에는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이다. 문신예술가들은 의료행위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이다.
“캔버스가 아닌 몸이란 것만 다를 뿐 문신도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러자 의사협회 관계자들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물었다.
“문신할 때 마취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위험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문신예술가들이 답했다.
“문신을 양성화하고 국가기관이 위생감독을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문신은 아주 오래된 행위였다. 선사시대 벽화에 문신이 있고, 기원전 2000년쯤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미라에도 문신자국이 있다. 어부들은 상어나 악어를, 사냥꾼들은 범이나 표범을 그려 넣었다. 그렇게 해서 두려움을 쫓고 몸 속의 용기를 끌어냈다. 이렇듯 초기 문신들은 주술적·종교적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다 차츰 사회적 형벌로서 문신을 새겨 넣었다. 우리도 고려시대에 도둑질을 한 자에게 ‘盜’라는 글자를 팔뚝에 새겨 넣었다. 도망친 노비가 잡혀오면 팔뚝이나 얼굴에 문신을 해서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고, 화인(火印)을 남겨 ‘사람 속 감옥’에 가둔 것이다. 조선 성종 때 색을 너무 밝혀, 그 때문에 처형된 어우동(於于同)은 관계를 맺은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팔뚝이나 등판에 먹물로 새겨넣도록 했다. 어우동이 남자들에게 씌운 그들의 죄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어느 시대거나 문신은 있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도 의형제를 맺거나 조직의 결속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내들은 서로의 팔뚝에 똑같은 글자나 문양을 새겨넣었다. 또 월남전에 파병된 군인들 사이에도 호랑이, 용, 야자수 등의 문신이 유행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문신이 흔한 시대는 없었다. 여자들도 예사로 눈썹문신을 하고 있다.
요즘 문신은 가볍다는 느낌이다. 옛날 문신이 어떤 상징이거나 저주였다면 요즘 문신은 그런 구속에서 해방된 것일까. 문신도 자유를 획득했음일까. 그러나 그 가벼움과 자유로움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성범죄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자는 것은 분명 또다른 `문신 형벌의 변형이랄 수 있다. 신용카드 사고가 빈발하자 사고 예방을 위해 몸 어딘가에 바코드를 새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이것 또한 문신 아닌가.
그 문신은 신분을 나타낼 것이다. 없는 자와 가진 자, 높은 자와 낮은 자를 가려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문신을 새기는 그 날, 그 때를 말세로 보는 사람도 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있는 자는 그 짐승의 이름을 세어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요한계시록 13장 16~18)
종말론을 거론할 때 인용되는 성경구절을 들여다 보자. 절대권력을 가진 한 통치자가 세상사람들에게 어떤 표를 주는데 이 표를 지녀야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른손이나 이마의 표는 무엇일까. 아마도 고도로 진화된 바코드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성경에서는 이 표를 `짐승의 이름으로 위험하다 경고하고 있다.
정보화사회에서 신용 범죄를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몸 속에 신용카드를 삽입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지구촌은 매일 팽창하는 신용카드의 제국이다. 다양한 용도의 카드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는 사회 구석구석에 촘촘히 설치된 카드의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고 있는 형국이다. 너나 없이 신용카드 제국의 신민들이 되어가고 있다. 범죄의 동기를 캐다보면 카드가 등장한다. 카드빚을 갚으러 강도짓을 하고, 남의 카드를 훔쳐 욕망을 채운다. 카드의 분실과 위조카드의 유통은 시대의 악(惡)이 되어버렸다. 카드가 섬세해지면 복제기술도 정교해진다. 해결책은 무얼까. 다시 말하지만 인체에 바코드 같은 문신을 새겨넣는 것이다.
우리 몸 속에 개인 정보가 낱낱이 수록된 문신을 새겨넣는 그날이 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관리될 수 있다. 그날이 오면 누군가에게 사육되는 짐승의 시간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관리자들은 그 표를 통해 인간 모두를 가둬 버릴 수 있다. 인간심리와 유전자까지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조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신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나라가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신이 복잡해지고 정교해질수록 우리 사회도 복잡하고 정교해질 것이다.
어느 순간에 문신은 통제의 도구로 활용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활용하여 전자결재를 할 줄 우리가 어디 상상이나 했는가.
하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문신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에 문자와 부호를 새겨 넣는 것이 아주 사소한 일이 될 때는 문신이 어떻게 진화할지, 그래서 어떻게 활용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문신을 둘러싸고 벌어질 논란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문신은 미래의 부호이다.
김 택 근 시인/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