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고향, 어머니. 어려서는 서울로 돈 벌러 간 아버지 기다리느라 얼마나 가슴 떨렸던가. 나훈아의 노래 ‘고향역’의 가사처럼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내 고향’을 찾아오신 아버지에게서 나는 도시냄새.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고향, 어머니라고 해놓고도 명절 날 아버지가 몰고 온 도시냄새 때문에 나는 좀 엉뚱하게도 추석, 하면 도시냄새가 떠오르기도 한다.
추석에 떠오르는 도시냄새는 또 있다. 어린 나이에 돈 벌러 고향 떠났다가 명절 때 바리바리 선물 싸들고 오는 동무들이 가져온 냄새. 이제 겨우 열 몇 살인 아이들이 고향 온다고 남자아이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여자아이들은 양장에 뾰족구두를 신고 왔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 아무리 어려도 돈 벌면 어른대접을 받았는데 그 아이들은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으로 위로를 삼고 나는 그들의 어른행장을 신기해하고 부러워도 했다. 서울로 간 아이는 서울말을 쓰고 부산으로 간 아이는 부산말을 쓰면서 추석 전야의 술판을 벌였다. 아직은 학생인 나도 어른대접을 받는 그 아이들 덕분에 술판에 끼어들어 그 아이들의 타향살이 모험담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지금도 고향의 동무들이 어른들처럼 술상을 두드리며 유행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던 추석전야를 잊지 못한다. 고향에서는 추석명절 밤에 꼭 콩쿠르 대회를 열었다. 4-H회원들을 주축으로 귀향한 젊은이들이 마을회관에 나뭇가지와 오색테이프로 나름대로 멋을 부린 무대를 꾸미고 냄비, 바가지 등속의 몇 가지 부상품을 진열해 놓고 온 동네사람들을 회관 마당에 불러모은다. 노인들은 ‘생지랄’들을 한다고 혀를 차면서도 막상 어스름이 깔리는 무렵이 되면 고개를 외로 꼰 채로 회관마당을 기웃거린다.
옥천양반의 이수일과 심순애는 해마다 봐도 해마다 새롭다. 평소에 그렇게 얌전해 뵈던 뉘집 새댁이 그 당시만 해도 최신식 유행가이던 최병걸의 ‘잊지는 말아야지’라든가, 최헌의 ‘오동잎’을 부를라치면 노인들이 한구석에서 ‘애앵이’소리를 내고 젊은이들은 휘파람 섞인 환호성을 지르고 콩쿠르 대회는 바야흐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데, 옆집 아이가 내 옆구리를 찌른다. 아이가 내미는 것은 쪽지다.
‘대밭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겠음.’
초등학교 때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지게는 그대로 놓아두고 서울로 내뺐던 윗마을 머스매(머슴애의 방언)다. 대밭 모퉁이로 가면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 머스매가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지? 1학년 때는 공부를 못해서 내가 콩으로 더하기 빼기를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그때부터였나? 가만, 그러면 지난번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면장집으로 전화해서 마을 이장이 어떤 머스매한테서 전화왔다고 온 동네 다 들으라고 방송을 하게 했던 머스매가 바로 이 머스맨가? 나는 그때 방송을 듣고도 창피해서 전화를 받으러 가지 않았다. 머스매는 대밭 모퉁이 위 언덕의 소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왁자지껄하는 노랫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날 밤, 그 머스매하고 내가 나눈 대화.
‘서울은 서러워서 서울이더라. 돈 벌기는 쉽지 않더라. 공부에는 때가 있더라.’
그런데 왜 지가 전화했단 소리는 하지 않지? 그럼 나한테 전화한 머스매가 이 머스매가 아닌가? 한가위 둥근달은 이윽고 하늘 한가운데로 두둥실 떠오르고 밝은 달빛 아래 우리 둘이 있는 것이 새삼스레 부끄럽고 솔직히 이 머스매가 맘에도 들지 않았던 차라 나는 그만 퉁명스레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던 것인데….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세월이 흘러 명절에 고향에 갔는데 우리 동네를 통과해 가야 하는 윗마을로 올라가는 대밭모퉁이를 바로 그 머스매가 지 각시랑 지 애기랑 단란하게 올라가는 모습을 나는 먼 발치에서 얼핏 보았다. 그 머스매는 그해 그날 그 추석날 밤을 기억이나 할는지가 나는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추석이 되면 아련하게 떠오르다 말다 하다가 통 생각이 안 나다가 추석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떠오른다. 이젠 고향의 그 대밭 모퉁이도 예전처럼 운치 있는 은밀한 길이 아니고 시멘트로 말끔하게 포장이 된 대로가 되어 있고 그 머스매가 기대 서 있던 그 소나무도 없어진 지 오래. 추석이 되어도 젊은이가 없고 예전에 귀향하여 콩쿠르 대회를 열던 그 젊은이들은 모두 중노년이 되어서 예전에 콩쿠르 대회를 열 때의 자기들만 한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온다. 자가용들을 몰고 온다. 그래서는 각자 자기들 집에서만 추석을 쇠고 서둘러 자가용으로 도시로 떠난다.
이젠 명절에도 고향은 적막하다. 추석 전야의 그 걸판진 술자리도 없고 추석날밤의 콩쿠르 대회도 없고 오랜만에 만난 남녀의 은밀한 만남도 없는 명절은 적막하다. 이젠 먹을 것이 넘쳐나서 맛있는 명절음식 기다리는 설렘도 없다. 오히려 명절음식을 두고도 열량을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제발 다른 때는 몰라도 명절음식 가지고 열량 따지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처럼 재미없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요즘애들도 명절이 즐거울까? 명절을 기다리나? 예전에는 명절이면 더 외로운 사람들을 걱정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명절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명절이 무덤덤해지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명절은 말 그대로 밝고 환한 날이니, 그날만은 우리 모두 밝고 환해보자.
온누리를 밝히는 저 둥근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