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무대로 남북 간 외교전이 펼쳐졌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지난 8월 8일 밤 의장성명 채택을 끝으로 폐막됐다. ARF는 의장성명을 통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 잇따른 도발에 대해 ‘심각한 우려(grave concern)’를 표하고 북한을 향해 유엔 안보리 결의 준수를 촉구했다. 그러나 정작 북한은 ‘조선반도(한반도) 긴장 격화의 본질을 심히 왜곡하는 미국과 몇몇 추종국들의 주장이 반영됐다’며 ARF 의장성명을 비난하는 별도의 성명을 배포하며 반발했다.
올해 ARF는 문재인정부 들어 처음 열린 아세안 다자외교무대인 데다 지난달 북한이 자행한 ICBM급 도발, 북미 간 전쟁 위협 고조라는 상황에서 개최되어 더욱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정부는 회원국 외교장관들을 상대로 북한에 대한 제재 공조를 강화하는 동시에 ‘베를린 구상’ 등 대북정책 청사진을 설명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성과가 ARF 의장성명에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의장성명에는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 등 일부 회원국들이 주장한 내용을 반영하여 ‘쌍중단(double freeze)’ 및 ‘쌍궤병행(simultaneous progress)’ 그리고 ‘단계별(phase-by-phase)’ 계획 등이 한반도 상황을 다루는 방식 중의 하나로 언급되기도 했다. 또 ARF 회의를 앞두고 미 국무부가 북한의 회원자격 박탈에 대해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 문제는 이번 포럼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아세안 내에 회원자격 정지(또는 추방)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ARF는 과거보다 진전된 톤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비판하면서도 다소 중립적이고 기계적으로 비칠 정도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 또한 보여주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ARF 회의는 북핵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아세안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눈에 띄는 대목은 아세안 회원국들이 점증하는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더욱 적극적인 입장 표명에 나섰다는 점이다. 북핵 문제에 대한 표현도 지난해의 ‘우려’에서 ‘심각한 우려’로 격상됐다. 특히 아세안 회원국들이 ARF 개막에 앞서 개최한 외교장관회의를 통해 북한의 ICBM급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별도 성명의 발표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ARF가 공식 출범하던 1994년부터 호주, 태국 등 제3국을 통해 가입 의향을 밝힌 바 있지만 미국의 반대와 일부 회원국과의 복교 문제 등이 얽혀 6년이 지난 2000년에 와서야 가입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북한의 ARF 가입 17년 역사를 놓고 볼 때 아마도 올해처럼 고립무원의 상태로 내몰린 적은 드물 것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양자회담을 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러나 아세안 국가들이 북핵을 문제 삼아 북한과의 관계를 단절 수준까지 몰아가리라고 보는 것도 섣부른 판단이다.
아세안 10개국은 모두 북한과 수교국이고 과거 비동맹운동의 영향과 구사회주의 정치체제 등의 영향으로 이제까지 남북 간 현안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고 제재를 부과하는 유엔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될 때마다 아세안은 이보다 낮은 수준의 입장을 표명하는 선에 그쳤다. 그동안 ARF 회의를 결산하는 의장성명에서도 북한에 대한 비난(condemn)보다는 우려(concern)를 표명하는 선에 머물러 온 것도 이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자행된 김정남 암살 사건에 대해 아세안이 공동성명 채택에 실패한 것 또한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국민이 북한 공작요원의 음모에 희생된 사실이 드러났고 말레이시아 외교관을 상대로 북한이 ‘인질외교’를 벌였는데도 아세안은 한목소리로 대응하지 못했다.
아세안 국가들이 대부분 북한의 핵개발을 비난하면서도 수위 조절에 지나치리만큼 민감하고 제재 압박과 동시에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ARF 창립 당시부터 유지해온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 ARF는 출범 이듬해인 1995년 브루나이 회의에서 ‘신뢰 구축 조치 증진→예방외교 메커니즘 개발→갈등 해결에 대한 점진적 접근’ 등 3단계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하나같이 무형의 자산인 신뢰와 토론, 그리고 포괄적 합의를 중시하는 아시아적 사고를 반영한 규범들이다. ARF의 북한 퇴출과 같은 제안에 아세안 국가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것이다. 다양한 정치이념과 문화를 가진 역내 국가들 간에 대화 협의의 장을 마련한다는 아세안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세안은 회원국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행위규범으로서 이른바 ‘아세안 방식(ASEAN way)’을 구축해 발전시켜왔다. 흔히 ‘아세안 방식’은 경쟁과 협상보다는 협의와 설득이라는 방법으로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서구적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과는 달리 비공식 대화의 중요성과 제도의 최소화가 강조되고 협의와 합의를 거치는 의사결정(consensus building) 방식이 선호되기도 한다.
또한 아세안 국가들은 3R로 통칭되는 자제(Restraint), 존중(Respect), 책임(Responsibility) 등의 규범을 내세워 내정불간섭 원칙을 강조한다. ‘조정의 외교(diplomacy of accommodation)’라는 표현도 아세안 관련 문건의 앞머리를 차지한다. 아세안이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규범이 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 회원국 간 미묘한 이견이 노출될 때마다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과정에서 아세안이 가진 영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회성 목표를 세워 단기적 설득외교를 벌이기보다는 비공식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전략 대화 프로그램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 간 대화도 중요하지만 민간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 또한 소중하게 키워나가야 할 자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통일부는 이러한 취지로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코리아 글로벌 포럼’의 첫 번째 해외 세미나를 지난 7월 25일 싱가포르에서 개최한 바 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동남아시아 각국 전문가들 중 다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재와 동시에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한국 정부가 대(對)아세안 외교에서 북한에 대한 비난을 일방적으로 요구해왔던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재인정부가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나아가 이들 중 일부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의 복원 과정에서 아세안이 중재와 조정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물론 대아세안 외교를 북핵 문제에 국한시켜 이해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아세안 국민 약 50만 명 중 40%에 해당하는 20만 명 정도가 비전문취업 비자(E-9)로 입국한 근로자들이다. 결혼이민자 역시 9만 명 수준에 이른다. 한국과 아세안 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양국의 사회문화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높이려는 각계각층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더 이상 한반도 주변에 국한돼 있는 안보 위협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세안을 상대로 하는 북핵 외교는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 특히 역내 평화와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여정에 들어선 아세안 국가들로 하여금 북한발 핵도발이야말로 이들 국가들이 수십 년 동안 누려온 평화-안정-발전의 생태계를 깰 수도 있는 결정적 위협요인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경험한 아세안 국가들의 경우 북한의 경제개발 모델과 관련해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과정에서 아세안이라는 외교적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정부 부처 간, 민관 간 효율적 협업구조를 창출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외교부와 통일부 등 정부 부처 간 협업은 물론 ‘한-아세안센터’와 같은 협력 네트워크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북한 문제를 염두에 둔 대아세안 외교 역량의 강화도 필요하다. 한국과 아세안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동반자로서 새로운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다면 이는 아세안 창설 반세기를 맞는 올해 매우 의미 있는 진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성기영 | 통일부 통일정책협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