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정을 나누고 앎을 키우고 힘을 모으는 일의 재미를 온몸으로 체득한 셈이다.”
은유 작가에게 글은 그렇게 찾아왔다. 젊은 날 회사에 들어가 일하던 중 맞닥뜨린 부당한 상황을 글로 써 알리게 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과 신문을 만들고 소식지를 만들었다. 동료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썼다. 그 밀도 높은 3년을 은유 작가는 온몸으로 살아냈다. 누군가에게 글은 ‘몸의 언어’다. 내가 겪고 살아낸 시간을 복기하는 힘이다. 그 기록은 앞으로 겪고 살아낼 시간에 대한 근력이 된다.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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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매체에서 의뢰하는 외고를 쓰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글을 써 책을 냈다. <올드걸의 시집>,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 <도시기획자들>, <글쓰기의 최전선>이 그렇다. 최근에는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쓰기의 말들>, <출판하는 마음>도 펴냈다. 2011년부터는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글쓰기 강의를 했다. 학습 공동체 ‘말과활아카데미’와 글쓰기 모임 ‘메타포라’에서도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마을공동체의 청년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를 위한 글쓰기 강좌도 열었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죠. 저는 모든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쓰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면 그래도 되죠. 다만 쓰지 못해서 고통스럽다면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쓰는 고통보다 안 쓰는 고통이 커서 쓰게 됐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병에 걸렸으나 아픈 줄 모르는’ 영혼을 깨우는 작업이고, 열심히 살수록 공허해지는 삶의 구멍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가 하나의 유행이 되어 영어나 운동처럼 ‘남들이 좋다고 하니 나도 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글쓰기는 적어도 남들이 결정한 것을 따라 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므로.
“글쓰기를 함께하는 학인들에게는 저마다의 ‘절실함’이 있어요. 정리되지 않는 삶을 정돈하고 싶은 마음,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보고 싶은 소망이 있죠. 글을 쓴다는 건 먼저 나의 감정을 직시한다는 거고, 그건 이미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상황에 함몰되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죠.”
내 생각을 글로 쓰면 남의 말도 잘 알아듣게 된다
은유 작가의 삶에 ‘절실함’이 찾아온 건 30대였다. 출산과 육아를 지나면서 삶의 난도가 높아졌다. ‘양육의 기쁨과 양육의 고통은 희비의 쌍곡선’처럼 마음을 어지럽혔고, ‘엄마라서 행복하고 엄마라서 불행한’ 시간이었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애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 글은 그의 첫 산문집 <올드걸의 시집>이 되었다. 시의 언어는 그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생의 감각을 표현해주었다. 시를 읽으며 견디는 나날들이 있었다. 그날들의 기록은 비슷한 사투를 벌이는 이들과 공명하는 계기가 됐다. 슬픔은 슬픔을 알아보고, 고통은 고통을 알아본다. 존재가 존재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존재는 위로받는다.
“제가 글을 쓰면서 저와 한 약속은 ‘내 생각을 쓰자’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인 척 말하지 않고 흉내 내지 말자고요.”
그러려면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가 썼듯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힘은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는 믿음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은유 작가는 글을 쓰고 난 후 삶이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 더 나빠져도 위엄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삶에 대한 태도도 연마했다. 예를 들어 ‘좋은 엄마’라는 타이틀은 누가 정의한 것이며 누구에게 ‘좋은 엄마’인지를 궁구해보게 됐다. 그는 스스로 ‘다정한 무관심’을 지닌 엄마가 되자는 결론을 내렸다. 고민은 계속된다. 이미 장성해 군에서 제대한 아들의 밥을 기꺼이 차리면서도 개수대에 서서 문득 아들이 ‘가사노동의 고단함과 감사함’을 알게 되길 바란다. 이 고민의 과정 역시 한 편의 글이 됐다.
“결국 나에 대한 태도가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내 슬픔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의 슬픔도 보이죠.”
은유 작가는 이를 ‘감응(感應)’이라고 표현한다. 연애 문제로 속앓이를 하는 친구에게 감응하고,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에게 감응하고,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의 거친 손에 감응한다. 감응은 감정의 자극을 받아 ‘반응’한다는 점에서 감동과 다르다. 이런 연유로 그의 글쓰기 강좌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의 삶을 살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르포와 인터뷰가 그의 강좌의 마지막을 채운다.
“글공부가 곧 사람 공부라고 할 때 인터뷰는 두 가지를 아우르는 최고의 방법이에요. 그래서 맨 마지막에 인터뷰를 합니다.”
10주가량 배운 글쓰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곧 타인에 대한, 사람에 대한 태도를 검증하는 자리가 된다. 그가 외고를 쓸 때 가장 재미없는 시간은 ‘정해진 말을 하는’ 이들을 인터뷰할 때였다. 반대로 ‘살아 있는 말을’ 들을 때 그는 신이 났다. ‘나만의 언어’를 가진 사람의 것은 말이든 글이든 생기가 있는 법이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먼저 글 쓰는 시간을 정하세요. 그 시간엔 어떤 일이 있어도 쓰겠다고 다짐하고 써보는 겁니다. 책을 읽을 때도 혼자 읽는 것보다는 같이 읽는 게, 글을 쓸 때도 혼자 쓰는 것보다는 같이 쓰는 게 힘이 됩니다.”
은유 작가는 카페에서든 식탁에서든 글을 쓴다. 책을 많이 읽기보다는 깊이 읽으려 애쓴다. 글을 쓸 때면 누군가가 보리라 생각하며 공을 들인다. 그는 크게 욕망한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글쓰기 덕분에 내가 나로 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삶이 글에 빚졌다”고 말한다.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