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제11호-특집Ⅱ>주한 외국인들의 ‘우리 알짜문화’ 교유기(交遊記)
- 작성일
- 200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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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다.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축제의 기간.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북적대는 기차 안에서든, 막히는 고속도로 위에서든 마냥 들떠 오른다. 오죽하면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면 반갑다고 했을까? 자신의 고향을 떠나 한국인보다 더 한국문화의 향기에 흠뻑 빠진 이방인들이 있다. 한옥에서 30년째 사는 한 미국인 사업가는 “한국사람 다 됐는데 불편할 게 뭐 있겠느냐”고 취재진에게 반문한다. 쌀뜨물로 국물을 낸 청국장에 푹 빠진 이란 왕족 출신의 가정주부, 지난 시드니올림픽 때 우리 여자선수의 발차기에 반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독일 여학생, 허름한 시장의 한 음식점에서 맛본 김치를 잊지 못해 김치 마니아가 된 외교관 부인까지…. 설을 앞두고 한국에 둥지를 튼 외국인과 외국계 한국인이 말하는 ‘한국문화 예찬론’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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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1.“한류도 글로벌 스탠더드 필요한 때”>[/B][/U]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13세기 중엽 중국 원나라에서는 ‘고려양(高麗樣)’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고려의 복식이나 음식을 따라 하는 것이 큰 인기를 끌면서 나온 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한류열풍인 셈이죠.”
방송인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계 한국인 이참(50·옛이름 李韓佑) 씨의 말이다. 그가 애초 이름을 ‘이한우’로 했던 것은 ‘한국을 돕겠다’는 뜻이었고, 다시 ‘이참’으로 바꾼 것은 ‘한국문화에 동참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이씨가 우리 문화를 처음 접한 것은 1978년. 초교파(超敎派)교회 활동을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이씨는 지금의 아내 이용복 씨와 만나 가정을 꾸리고, 1986년 귀화해 현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평소 진돗개를 사랑하고 십전대보탕과 매운탕을 즐겨 먹는 그가 귀화를 결심한 데는 한국문화의 매력이 가장 커다란 동인이 됐다. 특히 한국의 ‘잡탕문화’ ‘퓨전문화’에 흠뻑 빠졌다고 그는 말한다.
“고려양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문화가 해외에서 주목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처음 한국문화를 접했을 때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문화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적 표현이 언젠가는 세계인의 관심을 끌 날이 올 줄 알았어요.”
[B]방송 드라마 조연으로도 단골 출연[/B]
그가 한국에서 드라마 출연 등 방송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그의 선견지명(?)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처음 공중파 방송에 등장한 것은 1980년 외국인 웅변대회를 통해서였다. 이후 그는 각종 쇼 프로그램의 단골 손님으로 초대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KBS-3TV(현재의 EBS)에서 독일어 회화 프로그램을 5년 정도 진행했다.
그 와중에 이씨는 우연히 드라마 출연 기회도 얻었다. 당시 큰 인기를 모았던 MBC 드라마 <수사반장>에 연기자로 데뷔한 것. 이후 그는 사극에서부터 시트콤까지 안해 본 장르가 없다. 이 중에서도 그는 특히 멜로드라마에 출연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지난해에도 <천국의 계단>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에 잇따라 출연하기도 했다.
“사실 제가 방송활동을 시작한 것도 한국 드라마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죠. 한국 드라마를 보면 감성이 풍부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해외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나 연기자들에게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하지만 최근의 한류에서 나타난 특징은 배우나 가수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문화와 풍습, 심지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수한 영상물이나 노래가 범아시아인들에게 관심을 끌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알리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불어닥친 ‘욘사마 열풍’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몇 조 원대에 달한다고 합니다. 관련 캐릭터나 책, 게임뿐만 아니라 심지어 양말 브랜드까지 등장할 정도예요. 문화가 곧 ‘돈’인 세상이 된 것이죠.”
그는 한국산 자동차가 해외에서 고공행진을 하는 데도 우리 문화가 일정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 자동차의 경우 품질 대비 가격경쟁력이 우수해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상당부분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화가 자연스럽게 현지인들에게 뿌리내리면서 한국 연예인들이 타는 자동차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거죠.”
[B]한류 자리잡으려면 투자 더 늘려야[/B]
그는 현재의 한류열풍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국문화를 더 고급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거꾸로 한류를 한국상품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브랜드 마케팅 도구로 활용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최근 부는 한류열풍이 다소 과대포장된 점도 있겠지만, 상품가치가 있으면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할리우드류’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제로 세계 역사 속에서도 문화는 항상 돈과 연관이 있었다. 문화의 주류는 부유한 곳에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투자한 만큼 문화의 질은 올라가게 돼 있다”고 그는 말한다. 문화적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이미지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변화와 노력 끝에 이뤄지는 산물이 바로 문화입니다.”
독일의 자동차가 한 예다. 독일 자동차는 세계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독일의 고급문화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영국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만으로도 엄청나게 국가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5,0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졌음에도 상품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아직도 지구촌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태권도’ 혹은 ‘한국=동방의 작은 나라’라는 등식으로 이해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한국적인 것만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생각할 때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를 한 단계 숙성시키기 위해서는 세계화의 물결에 우리 문화를 과감하게 내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치를 세계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김치 콘텐츠를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소홀합니다. 이에 반해 이탈리아 피자는 ‘김치 피자’ ‘불고기 피자’ 등 우리 식성에 맞게 다양한 제품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김치를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RIGHT]이석 객원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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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2.“소박한 한국미에서 자연과 교감 느껴”>[/B][/U]
[SET_IMAGE]5,original,right[/SET_IMAGE]동북아의 관문 인천국제공항 철도사업 프로젝트 고문으로 일하는 독일인 버트 파이퍼(65) 씨. 토목공학자인 그는 1993년 한국고속철도(KTX) 건설사업을 위해 2년 일정으로 한국에 왔다 한국문화의 매력에 푹 빠져 11년째 ‘정착’하고 있다.
업무 외 시간을 이용해 한국의 전통음악·고미술·고가구 등을 두루 섭렵하던 그는 특히 한국 도자기에 흠뻑 빠졌다. “한국 도자기의 소박함에 반했다”는 그는 이미 서울 인사동에서는 도자기 수집가로 소문났다. 주말에는 경기도 이천의 도요를 직접 찾아가 도자기 굽는 법을 공부한다.
그가 한국 도자기에 각별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울시청 근처 지하도를 걷다 우연히 한 호텔 도예방에 눈길을 빼앗겼던 것이 인연이었다.
“어머니가 도예를 전공해 어려서부터 도자기에 둘러싸여 자랐습니다. 덕분에 도자기에 익숙한 눈을 가졌지만 한국 도자기는 제가 봐왔던 독일 도자기와 많이 달랐어요. 흙을 재료로 불에 구워 만든다는 것은 같지만 어딘지 불완전한 듯하면서도 인위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B]도요 찾아다니며 자기 빚는 데 골몰[/B]
그날 분청사기의 투박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이후 시간 날 때마다 그 도예방을 들락거렸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도자기를 사지는 않았어요. 가격도 부담스러웠지만, 선뜻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작품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한 일이어서 매일 가게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가까워졌지만, 처음에는 도예방 주인도 저를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외국인이 매일 들러 도자기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기만 하고 정작 물건은 사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한국 도자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안 그분은 도예가들을 직접 소개해 주기까지 했어요.”
지난 10년 동안 파이퍼 씨가 수집한 한국 도자기는 150여 점. 김정옥, 지순탁, 권대섭 등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드는 도자기를 발견하면 무명 작가의 것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도자기와 가까워지다 보니 장인들과의 교유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 그는 틈만 나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도요를 찾아다닌다. 한국말을 못해 작가들과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도자기에 대한 열정을 공유한 만큼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는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보다 본능에 가까운 느낌이 중요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한 대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도자기는 일본이나 중국 도자기와 비교해 형태와 색이 매우 단순해요.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자연이 녹아 있죠. 그래서인지 한국 도자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작은 도자기 하나가 저를 자연과 연결시켜 주는 느낌이 듭니다. 그 느낌이 좋아 한국 도자기를 수집하지요.”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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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 <3.“설장구에 미쳐 한국에 주저앉았습니다”>[/B][/U]
[SET_IMAGE]7,original,left[/SET_IMAGE]게리 렉터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1994년 귀화했다. 한국 이름인 유게리(柳憩里·62)는 ‘수양버들 쉼터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라는데, 넉넉해 보이는 그의 외모만큼이나 푸근한 느낌이다.
미국 켄터키주에서 태어난 유씨가 한국에 온 것은 1967년. 24세의 젊은 나이였다. 40년 가까이 한국에서 생활한 그는 벽안 말고는 말투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에서조차 한국사람보다 더 토종 냄새가 물씬 난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나는 몸만 미제지 다른 것은 다 메이드 인 코리아”라며 넉살 좋게 웃는다.
한국에 귀화한 뒤에도 10년 넘게 <뉴스위크> 한국판에서 일하는 그는 순우리말과 한자성어 실력이 탁월해 한국 토박이들마저 혀를 내두른다. 가장 적절한 한국어를 찾아내 영어 기사를 옮기는 그의 능력이 신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걸어온 길과 무관하지 않다. 유씨는 그동안 사회봉사와 함께 광고 카피라이터, 칼럼니스트로 한국인들과 직접 살을 부대끼며 살아왔다.
그가 한국을 제2의 고향 삼아 안착한 것도 “한국만이 갖고 있는 정(情)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 한때 그는 <아리랑방송>에 출연했고, 대한항공의 기내지에도 열정적으로 투고를 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한국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사절단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B]“직접 설장구 전수해 준 제자도 여럿”[/B]
유씨를 이토록 한국문화에 빠져들게 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젊은 시절 농악에 매료된 것이 결정적 이유였어요. 전라도 굿거리와의 운명적 만남 때문에 한때 설장구에 미쳐 지냈거든요.”
유씨는 1972년부터 전북 정읍 우도굿의 대가로 알려진 김병섭 씨에게 직접 설장구를 배웠다. 그는 김씨가 작고한 198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그로부터 설장구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다. 덕분에 김씨는 생전에 유씨와 수십 차례나 공연을 함께 했다.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유씨는 그 후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설장구는 서서 치는 장구라고 해서 설장구입니다. 오로지 장구로만 연주하는 가락인데, 한때 저는 설장구를 쇠로 쳐보겠다는 희한한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장구만의 그 미묘한 가락을 쇠로 표현하기는 어렵더군요.”
처음 설장구를 배우면서 귀에 설게만 들리는 리듬과 가락을 체득하기도 쉽지 않았다.
“설장구는 빠름과 느림이 반복되면서 강약이 매우 풍부한 가락이죠. 팝과 재즈 등 서양음악에 익숙한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부모님께서 즐겨 들으셨던 컨트리 음악처럼 흥에 겨웠습니다.”
환갑이 훌쩍 넘은 그는 그동안 설장구와 조금씩 멀어졌지만 아직도 틈만 나면 집에서 장구채를 잡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너무 여유 없이 사는 한국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요즘 자기가 그런 신세란다.
“저도 모르게 여유가 없어졌어요. 한창 설장구에 빠져 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여유를 찾아 그 매력을 다시 한번 느껴 보려고 지금도 장구채를 잡습니다. 더 힘이 빠지기 전에 설장구를 메고 무대에 올라 봐야죠.” [RIGHT]백창훈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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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4.“한지와 나무·흙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란”>[/B][/U]
[SET_IMAGE]9,original,right[/SET_IMAGE]대문과 중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편에는 사철 푸른 대나무 숲이 싱그럽게 흔들리고 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대나무집’으로 불리는 피터 바돌로뮤 씨의 집이다. 해양중설비업체의 부사장인 바돌로뮤 씨는 이 한옥에서 꼬박 30년을 살았다.
“1974년 이 집으로 이사했으니 벌써 그렇게 됐네요. 어느 한 곳 제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죠. 이 집은 이제 제 분신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용조용 이어나가는 그의 우리말 솜씨도 세월의 손길과 함께 윤기를 더해왔을 춘향목 서까래 빛깔처럼 은은하게 다가온다.
그가 한옥의 매력에 빠진 것은 1968년. 미국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한국생활을 시작한 그가 하숙집을 구하면서부터다. ‘근방에서 가장 잘 지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는 그가 소개받은 집이 바로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船橋莊). 이 집은 이 지방 명문가인 이내번(李乃蕃)의 후손들이 살던 곳으로 이미 1967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집도 다 있구나 싶었죠. 그래서 당시 선교장에 살던 할머니를 졸라 방을 얻었어요. 할머니께서 ‘방을 몇 개나 쓸 거냐’고 하기에 다 써도 되느냐고 물으니 청소할 수 있을 만큼만 쓰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한 스무 개쯤 썼던 것 같아요. 이 방 저 방 쓰다 나중에는 딱 한 개만 쓰게 되더군요. 하하하!”
[B]강릉 선교장 스무 칸을 빌려 살기도[/B]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교장의 안주인 할머니는 흥선대원군의 보좌관을 지낸 분의 며느리였다고 한다. 천생 ‘조선 여인’이었던 그는 한옥을 보며 좋아하는 10대 후반의 새파란 외국인에게 이불 개키는 법, 방을 정리정돈하는 법, 한지문을 다는 법까지 꼼꼼하게 알려줬다. 바돌로뮤 씨 역시 선교장에 살면 살수록 한옥이 자꾸 좋아졌다고 한다.
“한겨울 밖에서 막 돌아와 뜨뜻한 아랫목에 몸을 녹일 때의 기분 아세요? 그 온돌의 맛을 정말 못 잊겠더군요. 선교장의 추억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1973년 직장을 서울로 옮겨 아파트생활을 시작했지만 그에게는 창살 없는 감옥 같았다. 선교장의 온돌이나 팔작지붕 정자,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가 그리워 견딜 수 없더라는 것. 결국 1년 남짓 아파트생활을 하다 이곳 돈암동 한옥으로 이사하고 말았다.
“살수록 정이 가고 인간친화적인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은 비닐장판이며 화학벽지, 이런 거 말고 한지와 나무·흙 속에서 살아야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건강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그도 처음에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거나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그가 한국사람인 기자에게 이렇게 한옥에 대해 한마디했다.
“한국생활이 40년 가까이 되는걸요. 저는 이제 한국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아,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왜 한옥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죠? 한옥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살기 좋은 집인데…. 혹시 집의 방향과 한옥 처마의 길이가 얼마나 과학적인 조화를 이루는지 아세요? 우리집은 남향인데 여름에는 햇볕이 비켜가고 해가 낮게 뜨는 겨울에는 집안에 햇살이 골고루 들어옵니다. 저기 저 마루 안의 햇볕을 좀 보세요.”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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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5.“쌀뜨물로 낸 청국장 맛 최고죠”>[/B][/U]
[SET_IMAGE]11,original,left[/SET_IMAGE]“청국장 싫어하는 사람 있나요? 냄새가 조금 역해서 그렇지,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는데요.”
KBS에서 TV 리포터와 라디오 진행자로 활약중인 이란 출신 위더 웰던(34) 씨. 한국생활 14년째인 그는 웬만한 한국 아줌마들보다 더 한국음식의 손맛을 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특히 한국의 장류(醬類)에 관심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청국장에 관한 한 마니아에 가깝다.
“저도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첫술을 뜨기 힘들었지만 한번 그 맛을 보고 난 뒤로는 청국장 예찬론자가 됐어요.”
그가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은 이란에 기술노동자로 파견됐던 한국인 남편(최양수 씨) 덕분이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국음식에 문외한인 전형적인 중동 처녀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먹어본 한국음식이라고는 남편이 일하던 한국 캠프에서 맛본 김치가 전부였다. 그가 살던 이스파한에는 한국식당이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B]“온 가족이 즐겨 먹는 우리집 제1식단” [/B]
이란 왕족 출신으로, 도회지에서 자라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가 한국의 시댁에 처음 인사드리러 갔던 날의 기억은 청국장과 어울려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남편의 고향집이 전형적인 시골 한옥이었는데 집안 어른들이 외국인 새댁이 온다니까 집안청소를 깨끗하게 해놓으셨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밤 정갈한 방에 누워 잠을 자려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거예요.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했는데 가만히 보니 벽에 걸려 있는 말똥같이 생긴 것의 냄새더군요.”
그는 벽에 매달린 메주를 처음 보고는 집을 지으려고 말똥으로 만들어 놓은 벽돌인 줄 알았다며 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독한 냄새를 참기 어려워 밤새 뒤척이다 남편이 잠든 사이 몰래 메줏덩이를 창 밖으로 모두 던져버렸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시어머니가 이 광경을 발견하고는 멋모르는 남편을 엄청나게 혼냈어요. 제가 큰 사고를 쳤던 거죠.”
그 ‘사건’이 있은 뒤로도 그는 시어머니가 자신의 신혼집에 직접 날라온 메주를 몰래 내다버리다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청국장 마니아가 됐을까?
“어느 날 시어머니가 청국장을 끓이는데 진하고 고소한 것이 맛있더라고요. 냄새가 별로 안 나 처음에는 된장찌개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시어머니께 어떻게 끓였기에 된장찌개가 이렇게 진하고 고소하냐고 여쭤봤더니, 된장찌개가 아니라 청국장이라고 하더라고요.”
하루 세 끼 한식만 고집하는 남편 덕분에 벌써 한국음식 만드는 데는 이골이 날 정도로 ‘선수’가 됐다는 웰던 씨. 김장 담그기에서부터 이제는 메주 띄우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그는 억척 한국 아줌마가 돼 있다.
“청국장은 남편은 물론 아이들이 모두 좋아해 저희집 밥상에 가장 자주 오르는 메뉴예요. 제가 만드는 청국장의 비법은 시어머니께 배운 것인데, 국물을 쌀뜨물로 낸다는 것이에요. 쌀뜨물로 국물을 내면 영양도 좋고 국물도 더 텁텁한 게 맛있거든요.”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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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6.“갓김치, 오이소박이 더 즐겨 먹죠”>[/B][/U]
[SET_IMAGE]13,original,right[/SET_IMAGE]멕시코, 포르투갈 등 외국 대사관저가 몰려 있는 서울 성북동에서도 가장 깊숙한 자리에 위치한 독일대사관저의 안주인 율리아나 가이어 씨. 그는 한국생활이 불과 1년6개월밖에 안 됐지만 주한 외국대사 부인 가운데서는 최고의 한국음식 마니아로 소문나 있다. 한국사람들조차 먹기 힘들어 하는 홍어찜도 먹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 “홍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 중 하나”라고 큰소리(?)칠 정도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대표음식으로 손꼽히는 김치에 관해서는 ‘전문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김치맛에 푹 빠져 있다. 성북구청이 매년 개최하는 외국대사 부인 김장체험행사에도 그는 앞장서서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런 그가 김치를 처음 맛본 것은 언제일까?
“남편이 한국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독일에서 김치맛을 봤지만, 사실 그때는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한국에 와서 진짜 김치맛을 보았는데 뭔가 확실히 다르더군요.”
2003년 한국을 처음 찾은 가이어 씨는 남대문시장을 찾았다가 다시 김치와 만났다.
“시장통의 한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그곳에서 김치의 진미를 맛보게 됐어요. 맛이 독일에서 먹었을 때와 전혀 달랐거든요. 토속적인 식당 분위기와 어울려 묘한 감동이 혀끝으로 전해오는 것을 느꼈어요.”
[B]“음식 따라 먹는 김치도 달라야 제 맛”[/B]
그날 이후 그는 자칭 ‘김치 마니아’가 됐다. 관저에 늘 김치를 준비해 두고 한국인 직원들에게 차려 주는 것은 물론 가족 식사 때도 식탁에 올리고는 한다. 남편도 한국음식을 좋아해 1주일에 두세 차례는 꼭 한국음식점을 방문하는데, 그때마다 부부는 식단에서 김치를 빼놓지 않는다.
“저는 배추김치도 좋아하지만 갓김치와 오이소박이를 특히 즐겨요. 또 신김치보다 막 담근 신선한 김치를 더 좋아하는 편이죠.”
그는 “김치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전해지는 신맛과 상큼한 느낌이 좋다”면서 “배추의 뿌리 부분은 짜고, 잎사귀 부분은 덜 짠 김치가 최고 맛있는 김치”라고 좋은 김치 감별법을 설명한다. 그는 김치를 맛있게 먹는 법도 조언한다.
“김치는 어떤 음식과 같이 먹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을 내요. 저는 따뜻한 쌀밥과 함께 먹는 김치도 좋아하지만, 돼지보쌈에 곁들여 먹는 매운 김치를 특히 좋아해요. 김치찌개도 좋아하고요. 보통 외국인들은 매운 것을 잘 못먹는다고 하는데, 저는 혀끝을 톡 쏘는 매운맛을 즐기지요.”
지난해 불우이웃돕기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김장 담그기 행사에 참가했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그 과정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자신이 직접 담근 김치는 너무 짜고 매워 실망했다며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한국의 음식 문화는 매우 다양한 것 같아요. 김치만 해도 종류가 정말 많고, 또 김치를 재료로 만든 음식은 끝이 없어요. 아직 못 먹어본 한국음식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한국식당에 가면 늘 새로운 한국음식을 만나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 중 하나예요.”
언젠가는 한국음식을 적접 요리해볼 요량으로 한국요리책을 3권 구입해 보관해 두고 있다는 가이어 부인. 그는 “언젠가 한국을 떠나겠지만, 한국에서 맛본 김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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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7.“TV 속 한국선수 발차기가 제 가슴을 꽝 때렸어요”>[/B][/U]
[SET_IMAGE]15,original,left[/SET_IMAGE]독일 출신 유학생 줄리아(21) 씨의 한쪽 팔뚝에는 ‘태권도’라는 한글 문신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그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태권도의 힘에 매료되어 인터넷을 뒤져 ‘태권도’라는 한글 글씨를 찾아내 문신 전문가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줄리아는 “그때 태권도라는 글자를 내 몸에 새긴 것은 태권도를 사랑한다는 나만의 다짐이었다”고 또렷하게 말한다.
TV를 통해 시드니올림픽을 지켜보던 그가 태권도 경기를 본 것도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 경기를 보는 순간 그는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선희 선수의 결승전이었어요. 그의 발차기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에서 꽝 소리가 나더니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한마디로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드니올림픽이 열릴 당시 줄리아 씨의 신분은 고등학생. 그는 그날 이후 태권도 도장을 찾으러 함부르크 시내를 온종일 헤매고 다녔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한국에서 유학온 태권도 유단자를 만나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2년 뒤 결국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시원하게 태권도에 대한 갈증을 풀고 싶었어요. 태권도 종주국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죠.”
줄리아 씨는 현재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도 배우고 있다. 방학 중에는 더 많은 시간을 태권도 수련을 위해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기술훈련보다 정신수양에 비중을 두고 있어요. 태권도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집중력과 판단력이 중요한 운동이라고 느꼈거든요. 한국의 정신을 알아야 진정한 태권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B]“태권도는 정신수양이 더 중요” [/B]
줄리아 씨도 여느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처음 한국에 올 때는 태권도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죠. 한국사람, 한국문화 등 한국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거든요. 음식이 얼마나 매운지,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도 한국에 와서야 알았죠.”
그가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입학한 것도 한국을 좀더 알고, 태권도와 더 깊어지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 줄리아의 생각은 적중했다. 한국어를 배울수록 한국을 더 많이 알게 됐고, 태권도의 정신세계도 더욱 또렷해졌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고 확신해요.”
하얀 도복을 정갈하게 입은 줄리아 씨는 “태권도를 배우러 와 한국에서 많은 신세를 진만큼 귀국 후 독일 대표가 되는 것이 꿈”이라며 도복 띠를 고쳐 맸다. [RIGHT]백창훈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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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8.“한국인만큼 자기 ‘말’ 지키려 한 민족 있나요? ”>[/B][/U]
[SET_IMAGE]17,original,right[/SET_IMAGE]1981년은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올림픽 개최국으로 결정된 해다. 그때 일본인들은 ‘도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이기에’라며 한국을 다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정치적 이슈로 가득한 나라’쯤으로 인식되던 한국이 처음으로 일본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나고야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 미즈노 순페이의 마음도 서서히 한국에 끌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원조 한류열풍이 불었던 때가 아닌가 싶어요. 제 또래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다양한 사건이 생겨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이유로 대학에서 ‘조선학(朝鮮學)’을 선택했습니다.”
미즈노 씨가 진학한 텐리(天理)대는 당시 한국학 분야에서 최고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2년간 조선학 실기론을 배우고, 2년간은 어학을 공부하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1986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거든요. 과연 한국인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을까 많이 긴장했는데, 이런 우려는 금세 없어졌죠. 한국사람들과 말이 통하는데, 얼마나 신기하던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조건 다가가 짧게나마 얘기를 나누는 재미에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어요.”
한국에서 전남대 국어국문학과에 다시 입학한 미즈노 씨는 별도의 어학과정을 받지 않고도 곧바로 학생들과 공부를 했고, 결국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즈노 씨는 공부를 계속해 ‘고대 국어 표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지금은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만큼 명실상부한 한글박사가 된 것이다.
[B]한국에서 학위 따낸 한글박사[/B]
“제 보물 1호가 한글 관련 고서자료들입니다. 1930년대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철자법 관련 서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정기간행물인데 모두 한글에 대한 애정과 노력으로 찾아낸 것들입니다. 이 자료들은 가치를 따지기 전에 일제 강점기 한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한국인들의 피와 땀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세계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 목숨을 바쳐 모국어를 지키려 한 민족은 한국인들밖에 없어요. 여기서 저는 한글이 존재하는 힘을 느끼고는 합니다.”
그의 한글 예찬 근거는 또 있다.
“한글은 우선 문자의 어울림이 완벽하고, 한자 음운학과 음양오행의 원리가 너무나 잘 적용된 언어입니다. 전 세계 어떤 언어도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없지만 한글만큼은 생성 과정의 원리가 너무 뚜렷합니다. 이런 과학적인 언어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있습니까?”
‘진짜 일본인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한글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미즈노 씨는 현재 모교인 전남대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한국어 실력에 대해 “여전히 2% 부족함을 느낀다”는 미즈노 씨. 한글에 대한 그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오는 7월부터 연세대 한국어 교육과정에 다닐 예정이란다. 3년 후 일본으로 돌아가 한글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다.
“지금 제가 가장 좋아하고, 그만큼 더 연구하고 싶은 것이 한글입니다. 그동안 한국에 머무른 이유도 한글 때문이고요.” [RIGHT]백창훈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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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9.“홍삼 가까이하니 마음까지 편해집니다”>[/B][/U]
[SET_IMAGE]19,original,left[/SET_IMAGE]사진기자 앞에 선 그의 ‘스마일 코멘트’는 홍삼이었다. 김치나 치즈가 아닌 “홍~삼”이라며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홍삼을 생각하면 기분까지 좋아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삼”을 발음하면서 입을 꼭 다물더니 이내 파안대소에 가까운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그렇게 웃자 예순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열 살쯤의 나이가 덜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활기찬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을 묻자 “홍삼 덕분이죠, 뭐”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웃는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34년을 한국에서 산 존 사도니스(58) 씨가 한국 홍삼의 위력을 알게 된 계기 역시 다분히 ‘한국적’ 상황에서 비롯됐다.
“따지고 보면 IMF 덕분이었어요. (IMF 사태가 터진) 그해는 제가 경영컨설턴트 일을 시작한 지 25년째 되는 해여서 더욱 기억에 많이 남아요. 한국기업이 속속 무너지기 시작하자 경영 자문을 하는 제 입장에서도 속수무책이더군요. 정신적 스트레스가 말도 못하게 컸어요.”
힘들어 하는 그를 지켜보던 한 미국인 친구가 권해준 것이 바로 홍삼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써서 꿀을 타지 않고는 입에 대지 못했다.
“며칠을 먹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몸에 좋은 것은 이해가 가겠는데, 마음마저 편안해질 줄은 몰랐어요. 참 신비하더군요. 홍삼의 사포닌 성분이 피로·무력감·식욕부진 개선에도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요.”
[B]“피로를 모르는 한국인들, 홍삼 덕분인가요?”[/B]
그때부터 그는 아침저녁으로 챙기는 홍삼환(丸)뿐 아니라 수시로 홍삼차와 홍삼음료를 즐기고 홍삼사탕까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홍삼 마니아가 됐다. 또 미국에 있는 부모와 고모 내외는 물론 같은 동네 주민들에게까지 홍삼을 선물하는 홍삼 전도사로 업그레이드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3년 전부터는 아예 한국인삼공사의 마케팅 고문이라는 직책까지 맡아 버렸다.
“순수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마케팅 조언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회사에 와서 인삼 재배지까지 다 살펴 보니 한국 홍삼이 좋은 이유를 알겠더군요. 홍삼은 6년근 인삼만 골라 만드는데, 4년까지는 재배가 쉬워도 그 다음부터는 정성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거든요. 일본이나 중국의 인삼이 따라오지 못하는 한국인삼의 효력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요즘 젊은 사람들을 공략하기 위해 간편한 티백 홍삼차의 마케팅 전략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정말 효과가 그렇게 좋으냐”고 재차 묻자 양복 안주머니에서 그날의 스케줄을 꺼내 보여줬다. 아침 9시30분부터 늦은 오후까지 2개 대학의 출장강의와 5개의 회의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저도 그렇지만 한국도 참 피곤함을 모르는 나라 같아요. 일을 해도 밤을 새우며 열심이고, 술을 마셔도 새벽까지 가죠. 혹시 한국사람들, 홍삼을 많이 먹어 그런 것 아닌가요?” [RIGHT]백창훈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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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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