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심는 씨앗용의 씨생강, 가시가 오돌도돌 난 향긋한 산두릅, 줄기까지 그대로 붙은 탱글탱글 실한 토종 양파, 미나리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다발로 쌓인 미나리 묶음, 비슷한듯 색도 맛도 제각각인 쌈채소 모종, 봄을 알리는 각종 씨앗과 묘목들. 시장 입구에서부터 봄을 넝쿨째 느끼게 하는 구례 오일장의 장거리들이다.
장에는 구경하는 재미, 물어보는 재미, 먹어보는 재미가 두루 있다. 방금 만든 따끈한 두부도 한 점 먹어보고 막 튀겨낸 설탕 잔뜩 발린 달달한 꽈배기도 하나 사먹어야 슬슬 시장을 구경하는 맛이 돈다. 뻥튀기 가게에 앉아 ‘뻥! 뻥!’ 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한참 구경을 하고, 뜨끈뜨끈 통통한 번데기 한 컵을 사서 이쑤시개로 찍어먹는 맛도 색다르다. 어린애들이 칭얼대지도 않고 시장 보기에 기꺼이 동참하는 이유도 그런 재미 때문이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느끼는 재미다.
봄 시장에는 푸르고 싱싱한 것들이 지천이다. 미처 이름을 알 수 없는 초록의 이파리들은 금세 아지랑이를 피우며 빨간 고무대야 위로 솟구칠 것만 같다. 도다리며 멍게, 주꾸미와 바닷장어도 제 몸을 활짝 열어젖히고 손님을 맞는다. 말만 하면 뭐든 금방 회로 떠주는 좌판도 여기저기 성업 중이다. 바닷가도 아닌데 회는 어디서나 인기다. 바닷가가 아니라서 더 인기인지 모르지만.
전라도의 장이 다르고 강원도 장이 다르고 바닷가 장이 다르고 산골의 장이 또 다르다. 구례 오일장은 예부터 지리산과 섬진강을 벗삼은 덕에 농축산물은 물론 산나물과 약초, 민물고기가 풍성했고 황금갯벌을 두른 순천과도 멀지 않아 갯것들이나 바다의 각종 생물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지리산을 병풍처럼 두른 고장답게 지리산에서 나는 당귀, 백지, 생지황 등을 바탕으로 한 약재시장으로 유명했고 더불어 지리산에서 채취한 더덕, 취, 칡, 송이, 토종 꿀 등도 풍부했다. 또 상위마을 등은 전국 최대의 산수유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하동이나 순천 사람들도 종종 구례 오일장을 보고 간다.
지리산권에서 가장 큰 3·8일 구례장
구례 오일장은 3·8일 장이다. 지리산권에서 가장 큰 장이다.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오일장은 전국적으로 3·8일 장이 가장 크고 다음이 2·7일 장이다.
예전에는 장돌뱅이들에 의해 오일장이 움직였으니 그도 그럴법하다. 그러니 어느 날에 장이 서는지만 봐도 그 장의 규모나 물산의 양을 어림짐작해 볼 수 있다.
무시로 시장을 휩쓸고 다니며 두릅도 사고 방풍나물도 산다.
바닷장어는 소금을 뿌려 구워먹고 동그랗게 금색 띠가 선명한 신선한 주꾸미는 매콤하게 볶아먹을 테다. 머리 속에 이미 완성된 접시가 그려진다. 그럼에도 시장에서 식재료를 살 때면 으레 “이건 어떻게 먹어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장터 아지매의 소소한 요리법을 순식간에 알아낸다. 때로는 정말 특별한 레시피까지 전수받기도 한다.
“이게 뭐냐”고는 함부로 물어볼 일이 아니다. 그러면 아지매손은 이미 봉다리를 열며 물건을 담기 직전이 된다. 그리곤 알아서 척척 요리법을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곧 아지매와의 작은 실랑이와 흥정을 거쳐 뭔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재료를 사와서는 괜히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며 생전 처음 만들어보는 요리도 해 보는 것이다.
‘검은 봉다리’ 안에 담긴 애틋한 감성
구례 오일장은 고속버스터미널, 구청 등과 가까운 구례읍에 위치해 구례 읍내장이라고도 불린다. 장은 크게 어물전(가동)과 잡화전(나동), 채소전(다동)과 싸전(라동)으로 구분되어 있다. 머리에 기와를 얹은 장의 모습이 구례의 전형적인 산골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이 기와지붕 밑으로는 국밥집이나 팥죽집, 지물포와 잡화점 등이 즐비하다. 어물전과 채소전은 역시 난전이 인기다.
애초 구매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어도 그 싱싱하고 탱탱한 모습을 보면 ‘한 봉다리’ 안 사고 지나갈 수가 없다.
시장은 얼핏 마트와 같은 용도의 공간인 것 같아도 그 질감은 사뭇 다르다. 재래시장에는 그만이 가진 특별한 정서가 있다. 아무리 물건을 많이 사도 ‘팔 빠지는’ 일이 없는 편리한 카트는 없지만, 그 대신 검은 ‘비닐 봉다리’에는 장날만을 기다린 소박한 먹을 거리와 소소한 생필품들이 가득 찬다.
마트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촌스럽고 자잘한 물건들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뻐근하게 하는 이유는 뭐가 들어 있는지 선뜻 보이지 않는 그 ‘검은 봉다리’들마다에 물건뿐 아니라 물건을 건네준 상인의 마음과 그 씀씀이까지도 섞여들어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럴 때 물건은 다만 물건에 그치지 않고 사고파는 우리들의 삶을 동시에 반영하곤 한다. 무언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 저쪽에서 이쪽으로 마음 혹은 삶의 고단함 같은 것들이 이 ‘검은 봉다리’ 안에 함께 묻어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필요에 의한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넘어선 애틋한 감성이 섞인다.
누가 만들고 누가 옮기고 누가 파는지조차 모르는 물건들, 마치 공장에서 생산된 것마냥 말끔히 포장된 식재료들이 감정 없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마트에서는 왠지 모르게 생명을 느끼기가 어렵다. 콩나물과 당근, 고추와 마늘이 나에게 오는 동안 거쳤을 땅과 하늘, 사람의 땀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무감(無感)의 마트와는 달리 사람과 사람의 눈빛이 오가고 말이 섞이고 온기가 흐르는 시장에서는 나물 한 소쿠리에서도 진한 삶의 체취가 느껴진다. 시장의 장보기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삶의 생기를 ‘덤’으로 얹어주는 장터 인심
공장에서 세척을 거쳐 예쁘게 포장된 재료는 없지만 거뭇거뭇 흙이 묻어 있는 인정 어린 덤, 마음을 사로잡는 1+1은 없지만 혼자 살아 많이 필요 없다는 말에는 “한움큼 그냥 가져가라”는 느닷없는 공짜, 시식 코너는 따로 없지만 전을 부치던 생면부지 아주머니의 차가운 손이 따끈한 전과 함께 불쑥 내 입으로 들어오는 경험. 시장에서 장을 보면 괜한 활력이 인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수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더 싸고 좋은 것을 찾아내느라 피곤하고 무기력하던 마음이 시장에서는 활력으로 되돌아온다. 팔은 무거워도 비로소 살아 있는 듯 생기를 얻는다. 생선 한 마리, 파 한 뿌리를 사고는 삶의 생기까지 한움큼 덤으로 얻는다. 춥고 덥고 때로 당황스럽고 쑥스럽고 불편하기도 한 시장이 나를 잡아끄는 건 그렇게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