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검지 손가락만한 생멸치 한 소쿠리, 멍게 한 바구니가 1만원이다. 줄줄이 펼쳐진 생미역은 작은 다발이 3천원이고 종류별로 좌판에 드러누운 제철 생선이나 구덕구덕 말린 건어물들도 5천원, 1만원이다.
미역은 그 종류나 색깔이 가지가지다. 나뭇잎처럼 싱그러운 색깔의 연초록 미역줄기는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암녹색의 굵은 주름이 잔뜩 진 미역, 잔주름이 자글자글 진 미역, 날개처럼 줄기가 하늘거리는 미역, 짙은 갈색의 두꺼운 미역, ‘꼬다리’라 불리는 꼬불꼬불하고 동글동글한 미역. 그런 미역의 모양이 꼭 가지가지 다른 사람 모양새 같다. 저마다의 미역 이름을 물어봐도 미역 파는 아주머니들의 대답은 그저 자기 식대로 제각각이다.
기장시장에는 그 명성에 걸맞게 멸치도 천국이다. 생멸치를 다듬어 횟감으로 팔기도 하고 젓갈용 생멸치도 있다. 한 소쿠리에 1만원하는 생멸치는 그 맛을 아는 사람에게만 신선한 감각으로 살아 들어온다. 생멸치회나 무침을 못 먹어 봤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외모지만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물고기의 맛이나 영양만큼은 봄의 보약이라 할 만큼 상당하다.
봄 멸치의 부드러운 속살
기장시장은 봄에는 미역과 멸치로, 가을에는 갈치로 유명하다.
올 봄에도 여느 봄처럼 좌판마다 미역과 멸치가 넘쳐난다. 시장에서 미역 한 묶음과 멸치 한 소쿠리를 사고 구멍가게에서 초장과 막걸리만 사도 즉석에서 봄바다의 한 가운데를 맛볼 수 있다.
멸치는 특유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멸치살이 뭉그러지지 않게 여러 번 씻는 것이 관건이지만 이렇게 시장통에서 간이로 먹을 때는 장사꾼에게 흐르는 물에 두어 번 씻어 달라 하고는 막걸리에 흔들어 먹으면 그런대로 비릿한 맛이 적당히 어우러진 싱싱한 멸치회를 맛 볼 수도 있다. 바닷가 시장통에서 막걸리의 역할은 상인의 피로를 풀어주고 손님의 흥을 돋워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멸치의 비릿내를 잡아주기도 하고 속탈까지 막는다. 여러모로 유용하다.
기장시장에는 대게집도 많다. 5월까지 조업하는 대게는 이제 슬슬 끝물이지만 대게 가게의 수족관마다 싱싱한 대게와 홍게가 넘친다. 외국에서 넘어온 킹크랩과 랍스타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크기에 따라 1킬로그램에 3만~5만원 하는 대게는 싼 편은 아니지만 철 지나면 먹기 힘든 귀한 녀석이라 사려는 사람도 팔려는 사람도 아직은 많다.
대게 맛보러 울진이나 영덕까지 찾아가기 번거로운 부산 사람에게도 기장시장의 대게식당은 좋은 대안이다.
젓갈가게도 풍년이다. 20~30종류나 되는 빠알간 젓갈들이 저마다 요염한 자태를 내놓고 자기자랑을 하지만 요즘은 멍게젓갈이 철이다. 입안에 넣으면 상큼한 바다향이 툭 하고 터지는 멍게를 비교적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으니 자꾸 주머니 안에서 지폐를 만지작거린다.
멍게젓갈은 다른 젓갈에 비해 덜 짠 편이다. 얼마간 냉장고에 바다향을 간직할 수 있는 멍게젖을 사다가 그 비릿한 냄새가 그리울 때마다 조금씩 꺼내 먹으며 입맛을 살려 볼까. 그러자면 잦아들었던 생의 활력도 기지개를 펼 것만 같다.
기장시장에 유명한 꼼장어와 갈치조림도 자꾸 출출한 배를 유혹한다. 큰일이다. 시장을 한바퀴 다 둘러보기도 전에 갖고 왔던 돈이 바닥나게 생겼다.
아귀와 가자미를 손질하는 아주머니는 사진 찍히는 줄도 모르고 오로지 자신의 두 손과 연장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다. 무시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여행자에게는 정신 없이 바쁜 시장의 모습이 다행으로 여겨진다.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이 무언의 폭력인 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솔직히 시장통에서 사진 한 장 찍을 때마다 그 허락을 받아내기란 영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다.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집이라면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쭈뼛거리는 여행자를 더 주눅 들게 할지도 모른다.
시장여행의 재미는 사람구경
하지만 이렇게 오가는 사람 많은 왕성하고 복잡한 시장에서는 누군가 사진 몇 장 찍는다 해도 아랑곳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저 바쁜 리어카에 채이지나 말고 여행자의 어수룩한 머뭇거림이 장사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 뿐이다. 이것저것 가격이나 요리법을 물으며 흥정하는 손님들의 어깨너머로 대신 얻어듣는 것도 솔찬하다. 혹여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가 넘어온다면 ‘쌩긋’ 먼저 웃어주는 것으로 반 이상은 그 경계를 푼다. 꽤나 장사를 잘하는 집은 목소리까지 높여가며 한결 여유로운 태도로 외려 카메라의 앵글을 끌어들인다.
"자~ 자~, 어디 이것도 한 번 자알~ 찍어봐봐. 요로코롬 예쁘게 찍어보랑께. 나도 좀 예쁘게 찍어서 거 뭐시기냐 인터넷에 올려서 소문을 내달랑께~"
그럴 땐 찍는 사람이나 찍히는 사람이나 서로의 얼굴에서 절로 웃음이 배어 나온다. 코너 하나를 돌면 나타나는 곳곳의 주전부리로도 시장의 재미를 십분 누린다. 작은 그릇 하나에 4천원 하는 전복죽이 구미를 당긴다. 바닷가 시장에서만 누리는 특권이다. 호박죽이나 팥죽을 함께 파는 시장통 죽집은 다리도 쉬어갈 겸 잠시 출출한 배를 달래고 가기에 그만이다. 간판이 따로 없는 시장모퉁이 떡집에는 쑥떡에 하얀 팥고물을 얼기설기 묻힌 쑥꿀레도 별미다.
“이건 조청이나 꿀을 찍어먹어야 맛있죠?” 하고 묻자 “오메, 서울 아가씨가 별 걸 다 안당께~” 한다.
바로 생선을 갈아 어묵을 만들어 파는 어묵집도 유명하다. 천원 하는 따끈한 어묵 하나가 어린애 발목같이 굵다. 부산하면 어묵이라더니 생선살 곱게 갈아 넣고 야채 고루 섞어 만든 튼실한 어묵이 쫄깃쫄깃 부산사람들 같다.
기장시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0분만 가면 멸치잡이로 유명한 대변항이다. 대변항은 요즘 멸치잡이 어선들로 한창이다. 남해 미조항과 함께 봄 멸치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기장 대변항이다.
대변항에서 생산되는 일명 왕멸치는 국내 생산량의 65~7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수확량이 많다. 그야말로 멸치 1번지다. 대변항에서 잡히는 멸치는 멸치볶음을 해 먹는 잔멸치가 아니라 회 떠먹고 찌개 끓여 먹고 쌈 싸먹는 대멸치다.
대변항 인근으로 60~70개의 멸치회집이 즐비한데 일반적인 항구의 횟집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횟집이 멸치회와 무침을 메인메뉴로 걸어놓고 있다. 해안에는 길거리부터 젓갈용 멸치도 상자마다 그득그득하다. '대변항=멸치' 라는 공식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멸치잡이 한창… 봄 멸치의 진수를 본다
멸치회는 고소한 맛이 일품이고 멸치회무침은 새콤달콤한 양념과 미나리 등의 아삭한 봄나물이 생멸치의 고소한 맛과 만나 생생하다. 회무침에 갖은 양념과 야채를 섞어 넣고 밥 한 그릇 슥슥 비벼 먹는 맛도 일품이다. 멸치를 갈치조림처럼 고춧가루 넣고 자작하게 조려서 깻잎이나 상추에 싸먹는 멸치쌈도 놓칠 수 없다.
이럴 때 막걸리나 소주는 멸치에 곁들이는 음료가 아니라 아예 멸치와 떨어질 수 없는 최고의 궁합이다. 약간은 비릿한 멸치의 맛이 술맛과 어우러져 절묘한 맛을 낸다.
이맘때쯤 대변항을 거닐다 보면 오후부터 해질무렵까지 꾸준히 들어오는 멸치어선을 만나는 일도 흔하다. 멸치 선원들의 멸치털이 한판을 보는 것은 살살 녹는 멸치회를 입에 넣는 것만큼이나 기장 봄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배를 항구에 붙인 6~7명의 선원들이 일렬로 서서 그물에 붙은 멸치를 털어낸다. 멸치는 그물에서 떨어지며 낱낱이 흩어져 온몸으로 춤을 추고 어부들은 무언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동요를 곁들이며 일사분란한 몸짓으로 군무를 펼친다. 한편 멸치털이 주위로 몰려드는 갈매기들에게는 배 주위로 널린 멸치를 마음껏 주워 먹을 수 있는 소문난 잔치다. 갈매기 떼에게나 사람들에게나 대변항에서 만나는 통통한 멸치는 봄의 기운 담뿍 들이 마시는 옹골진 활력이다. 오로지 봄에만 누릴 수 있는 이런 호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