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기 전에 아내가 ‘발뮤다 선풍기’를 사고 싶다고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는 것이었다. 나도 발뮤다의 사장이 소명 의식을 갖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발뮤다 사장 테라오 겐의 서정적인 스토리가 있다. 어린 시절 여름에 친구들과 함께 곤충 채집을 하려고 숲으로 가서 나무에 다가갔을 때 불어왔던 바람, 또 자전거를 타면서 온몸으로 맞았던 바람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기존 선풍기의 인공적인 바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바람을 만들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오늘날의 발뮤다 선풍기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제품을 구입해서 바람을 맞아보니 별로 시원한 바람이 아니다. 아니,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바람이다. 자연스러운 바람이 시원한 바람 아닌가? 아니지, 공기가 더운데 바람만 시원할 수가 있나! 깨달았다. 자연스러운 바람이 당연히 시원한 바람인 줄 알았는데, 공기가 더우면 더운 바람이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거였다. 올해 같은 살인적인 더위는 에어컨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선풍기의 거의 10배가 넘는 가격에도 왜 발뮤다를 살까? 비결은 역시 디자인이다.
▶ 1 발뮤다 선풍기 2 발뮤다 선풍기의 모든 구성 요소는 원통형을 기본으로 디자인했다. 날개가 들어 있는 머리도 원통형이다. 3 모터통 위로 옮긴 기능 버튼은 문자를 생략하고 그래픽 기호로 처리했다. 바람과 시간 조절은 버튼을 연속해서 누르는 것으로 해결해 버튼 수를 줄였다. 버튼은 표면 위로 튀어나오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 관건이다. 4 모터가 들어간 통, 모터통과 받침대를 연결하는 지지봉 모두 원통형이다. 받침대만이 윗부분이 밑부분보다 조금 더 넓지만, 이는 제품을 가볍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자연스러운 디자인이다. 5 지지봉의 높이 조절은 봉 일부를 빼고 붙이는 것으로 해결했다. 일반 선풍기의 지지봉은 높이 조절 때문에 단차가 생기거나 밑부분을 더 크게 디자인할 수밖에 없어서 이런 디자인을 채택한 것 같다.
발뮤다 선풍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리뷰 글이나 영상을 보면 시원한 바람, 또는 자연스러운 바람에 대해 칭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선풍기에 대한 만족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대단히 세련된 디자인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조용하고 전력을 덜 소모한다는 점이다. 발뮤다 선풍기를 만든 디자인 원칙은 ‘단순성’이다. MIT 미디어랩의 존 마에다 교수가 <단순함의 법칙>에서 말한 ‘SHE’의 개념이 잘 구현돼 있다. SHE는 압축하기(Shirink), 숨기기(Hide), 구체화하기(Embody)를 말한다.
이 제품을 처음 봤을 때 느낀 점은 작다는 것이었다. 집에 있는 다른 선풍기와 견줘보면 확실히 작다. 소비자는 작은 물건에 너그럽다. 작은 아이와 작은 동물이 동정과 귀여움을 받는 것처럼 작은 물건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더구나 작은데도 성능이 뛰어나다면 소비자는 이제 지갑을 열 명분을 얻게 된다. 같은 기능을 하더라도 작게 만드는 것은 단순함의 법칙, 특히 ‘압축하기’의 시작이다.
발뮤다 선풍기에서 압축하기는 작은 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핵심적인 요소는 단 하나의 입체 도형으로 모든 부분을 처리했다는 점이다. 냉장고나 세탁기가 같은 상자형 가전제품인 것과 달리 다소 복잡한 편인 선풍기를 하나의 단일 도형으로 디자인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발뮤다가 사용한 도형은 원통이다. 선풍기는 날개가 들어 있는 부분, 모터가 들어간 통, 받침대, 모터통과 받침대를 연결하는 지지봉, 이렇게 네 가지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 네 가지 부위가 모두 비율이 다른 원통형이다. 기존 선풍기는 그렇지 않다. 날개가 들어간 머리 부분은 중심 쪽이 통통하게 부풀어올라 있다. 지지봉은 밑부분이 조금 더 두껍고 위로 올라갈수록 얇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모터통도 뒷부분을 둥글게 처리한다.
즉 기존 선풍기와 발뮤다 선풍기의 외관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차이는 복잡성과 단순함의 그것이다. 그리고 발뮤다는 이른바 ‘순수한 형태’만을 이용했다. 순수한 형태란 원형, 사각형, 삼각형 같은 가장 기본이 되는 도형이다. 사람들은 단순한 순수 형태를 볼 때 에너지를 덜 빼앗겨 아름답다고 느낀다. 반면에 요소가 많고 복잡해지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므로 추하다고 느낀다. 소비자들이 세련됐다, 고급스럽다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통형이라는 순수한 형태, 그 단 하나의 입체 도형만을 사용함으로써 복잡성을 ‘축소’한 것이다.
SHE의 두 번째 원칙인 ‘숨기기’는 어떻게 구현됐을까? 기존 선풍기는 받침대 위에 투박한 버튼들이 튀어나와 있다. 회전과 타이머를 조절하는 손잡이까지 더해져 복잡하다. 최근에는 매끈한 표면에 소프트 터치 방식으로 변모했지만, 그것 역시 복잡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발뮤다는 이런 모든 조절 장치를 눈에 보이지 않게 모터통 위로 옮겼다. 눈에 잘 보이는 받침대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 전원을 켰을 때 비로소 작은 원형의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또 하나 숨긴 것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 선풍기 표면에는 on, off, 회전, 시간, 미풍, 약풍, 강풍 따위의 글자가 있다. 그러나 비교적 간단한 선풍기 기능을 생각해볼 때 이런 글자가 굳이 필요할까? ‘필요하지 않다면 없앤다’가 단순화의 핵심 철학이다. 이런 숨기기의 기술에 따라 선풍기의 표면은 매끈하기 그지없다.
독일의 위대한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디자인 10계명 중 마지막이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이다. 바로 단순함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축약하고 숨기면서 어떻게 좋은 품질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가? 그것은 직접적인 제품 사용에서 나타난다. 바로 바람이 덜 인공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것, 소리가 극히 미약하다는 것, 전력 소모가 적다는 것은 제품을 구입한 뒤 비로소 확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세련된 디자인, 그 자체가 높은 품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고 단순하고 깔끔하기 그지없는 제품이 기분 좋은 바람을 일으키고 소리도 작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SHE의 마지막 원칙인 ‘드러내기’다. 이것을 경험하면 소비자는 상품의 높은 가격을 합리적이라 판단한다. 거기에는 엄청난 노력과 기술이 투여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함을 경험하는 것은 에너지를 덜 쓰게 하지만, 단순함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김신은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