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조정현 사범
전국 돌며 빈민촌 아이들에게 태권도 알려 2008년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제4회 코리아 오픈 국제태권도대회. 페더급 결승에 오른 흑인 선수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승리를 거두자 그는 경기장에 엎드린 채 한동안 눈물을 쏟았다. 국제대회이긴 해도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가 아닌 이상 금메달을 땄다고 우는 선수는 드물다. 하지만 그에겐 사연이 있었다.
이 흑인 선수의 이름은 던칸 마슬랑구(남아프리카공화국). 가랑꾸와라는 흑인 빈민 지역에서 자란 마슬랑구는 13세 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태권도를 배웠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재능을 발휘했고 국가대표급 유망주로 떠올랐다. 2004아테네올림픽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출전한 대회마다 준우승에 머물렀고, 2008베이징올림픽에서는 아예 예선에서 탈락했다.
아내와 아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결국 2007년 말 도복을 벗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동생과 함께 이벤트 업체를 시작했지만 챔피언을 향한 열정은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스승의 끈질긴 설득까지 더해지자 그는 2008년 9월 도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그리고 두 달 만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따냈다.
그에게 다시 도복을 입힌 주인공은 마술랑구를 5년간 가르쳤던 조정현(43) 사범이다. 조 사범은 국기원이 전 세계 12개국에 파견한 12명의 정파사범 중 한 명이다. 15년째 남아공에 머물며 태권도를 전파하고 있는데 지금은 국가대표팀 코치, 육군 태권도 지도사범, 체육부 순회사범으로 활동한다. 대표팀 지도부터 남아공 전역을 돌며 태권도를 알리는 일까지 모두 그의 몫이다.
태권도를 알릴 수 있다면 오지나 빈민촌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맨발로 수련하는 제자들이 안타까워 자신의 신발을 벗어줄 정도로 열정적이다. 조 사범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빈민촌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알리는 일”이라며 “빈민촌 라마코카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운 뒤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며 희망을 갖는 걸 보고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국에 왔다가 돌아갈 때 후원받은 태권도 호구를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직접 껴입고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일화도 현지에선 유명하다. 조 사범은 “태권도를 배우려는 이들의 열정이 가르치려는 나보다 더 대단하다”며 “우리의 태권도를 널리 알리는 국가대표 사범으로서 한국에 돌아가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스리랑카 이기수 사범 스리랑카어로 된 태권도 교본 발간
스리랑카에는 이기수(41) 사범이 있다. 1997년 파견된 이 사범은 스리랑카에서 ‘태권도 스승’으로 통한다. 스리랑카 육·해·공군과 경찰이 정식 과목으로 태권도를 배우고 있어서다. 특히 스리랑카 경찰은 원래 특공 무술로 가라테를 배우다 이 사범의 가르침을 받은 뒤 태권도로 과목을 바꿨다. 스리랑카에 와 경찰학교 사범이 된 그는 1998년 전국가라테대회에 경찰팀을 이끌고 출전해 우승했다. 그 뒤 스리랑카 경찰은 가라테 대신 태권도를 무술 과목으로 채택했다. 가라테는 태권도보다 10년 앞서 스리랑카에 보급됐었다.
이 사범은 스리랑카태권도협회 기술심판위원장도 겸직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모든 이들이 이 사범의 제자인 셈이다. 이 사범은 “어려운 환경이지만 꿈을 안고 훈련하는 선수들이 너무 예뻐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태권도 시범 공연 개최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군과 경찰에서는 태권도가 인기 스포츠이지만 민간 영역에서는 아직 홍보가 더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스리랑카의 태권도 수련 인구가 약 2만여 명인데 이중 1만6천명 정도는 군이나 경찰 인력”이라며 “앞으로는 초·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태권도를 알리는 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스리랑카 언어인 ‘싱할라어’로 된 태권도 교본을 발간한 것도 같은 취지다. 싱할라어 태권도 교본은 이번에 처음 만들어졌다. 이 사범은 “정부 파견으로 나와 있는 만큼 태권도를 문화·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게 중요하리라 생각한다”며 “태권도가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인도 이정희 사범 힘들게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희망 전하다
12명의 정파사범 중 가장 늦게(2011년) 파견된 이정희(40) 사범은 정식 파견만 늦었을 뿐 인도에서 16년째 태권도를 알리고 있는 ‘태권도 대부’다. 국내에서 실업팀 선수로 뛰던 이 사범은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홀로 인도 땅을 밟았다. 인도에 태권도가 소개된 건 1976년이지만 지난 35년 동안 인도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거둔 성적은 동메달 1개였다. 하지만 2012년 이 사범이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팀은 확연히 달라졌다.
올해 7월 열린 춘천국제태권도대회에서 인도 대표팀은 금메달 2개를 포함해 5개의 메달을 따냈다. 이를 포함해 대표팀은 지난 1년간 각종 국제대회에서 메달 25개를 휩쓸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해본 좋은 성적이었다. 이 사범은 “선수들이 잘했을 뿐”이라고 공을 돌리면서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기 시작하자 인도 정부에서도 태권도를 엘리트 종목으로 육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인도의 태권도 수련 인구는 42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중산층에게는 건강을 위한 스포츠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주는 스포츠로 갈수록 인기가 높아지는 추세다. 이 사범은 올해 11월 열릴 ‘제1회 대사배 국기원컵 전국 태권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인도 전역에 태권도 도장과 태권도 아카데미가 생겨나 인도 국민들이 태권도를 국기로 수련하는 게 나의 꿈”이라며 “특히 빈부 격차와 신분제의 틀 안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태권도를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장원석 기자 2013.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