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10월 24일 원전의 단계적 감축, 재생에너지 확대, 지역·산업 보완대책이 담긴 에너지전환 로드맵을 발표했다. 로드맵은 에너지 정책에 대한 계획과 전략이 담긴 청사진이다. 긴 안목으로 속도를 조절하며 충격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에너지 체질 개선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원전이 단계적으로 줄어드는 자리에 대체에너지가 채워질 수 있게 점진적으로 접근한다.
대한민국이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 사회로 내딛는 발걸음, 그 시작은 원전의 단계적 감축이다. 정부는 ‘에너지전환 로드맵’을 통해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재개하되, 현재 계획된 신규 원전 건설계획은 백지화하고 노후 원전은 수명연장을 금지하기로 했다.
단계적 감축 대상 원전(계획 포함)은 모두 21기다. 이중 신규 원전은 신한울 3·4호기, 천지 1·2호기, 명칭이 정해지지 않은 2기를 포함해 6기다. 2038년까지를 기준으로 노후 원전은 고리 2~4호기, 월성 2~4호기, 한빛 1~4호기, 한울 1~4호기 등 14기가 해당한다. 이와 별도로 월성 1호기는 조기 폐쇄된다. 1982년 발전을 시작한 월성 1호기는 2012년 30년의 설계수명이 종료됐지만 3년간의 연장을 둘러싼 진통 끝에 2015년 운전을 재개했다. 이후 인근 주민과 시민단체가 수명연장 허가 무효처분확인 소송을 냈고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으나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항소로 가동을 유지한 채 2심 진행 중에 있다. 월성 1호기가 영구 정지에 들어가면 고리 1호기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가동 중지 원전이 된다.
정부는 에너지전환 로드맵에 따라 가동원전을 2017년 24기에서 2022년 28기, 2031년 18기, 2038년 14기 등 단계적으로 감축할 예정이다. 원전의 건설·폐지에 따라 설비 용량에도 변화가 생긴다. 2017년 22.5GW(기가와트)인 원전 설비 용량은 신규 원전 건설과 노후 원전 폐쇄에 따라 결과적으로 4기가 늘어 2022년 28.9GW로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후 2031년 20.4GW, 2038년 16.4GW로 점차 감소하는데 현재 대비 2031년 2.1GW, 2038년 6.1GW가 감소한다. 원전 설비 공백은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채워가며 원전 가동은 2082년에서야 완전히 멈추게 된다. 제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2017~2031년)과 제3차 에너지 기본계획(2038년)에는 이러한 원전의 단계적 감축 방안이 반영된다.
전력수급 문제 없어
정부는 에너지전환 정책에서 연착륙을 예고했다. 일각에서는 전력수급과 비용을 거론하지만 정부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대책도 마련해나갈 방침이다. ‘전력수급’ 하면 2011년 발생한 대규모 정전의 공포가 떠오른다. 하지만 당시 정전은 발전시설 부족에 의한 게 아니었다. 전기가 필요할 때 발전소를 적절히 가동하지 못한 전력 운영의 문제였다. 오히려 전력은 남아돌고 있다. 폭염으로 냉방 수요가 늘었던 올여름, 최대 전력수요는 7월 21일 84.59GW를 기록했다. 전체 발전설비 용량 약 113GW 가운데 발전설비 예비율은 34%에 달했다. 발전설비 예비율은 전체 발전설비 용량 중 최대 전력에도 가동되지 않는 예비 발전설비 비중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설비 예비율이 남는 것은 전력수요에 비해 공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최근 1년간 고리 1호기 등 4기의 발전기가 폐지되는 동안 1.24GW의 공급이 줄었다. 반면 신고리 3호기, 태안 화력 9호기 등 발전소 15기가 새롭게 가동하며 설비는 약 13GW 증가했다. 2022년까지 건설되는 발전소는 신고리 5·6호기를 포함해 총 19기로 17.8GW에 달할 전망이다. 그동안 전력수급은 최대 전력에 맞춰 발전설비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의도였지만 그 결과 전기수요의 성수기와 비성수기 간 격차가 갈수록 벌어졌다. 2016년 격차는 37.1GW였다. 그만큼 비성수기 때 가동을 중단하는 발전설비가 증가하는 셈이다.
한편 2015년 발표한 제7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은 2030년 전력수요를 113.4GW로 예상했다. 하지만 지난 9월 제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 수요 전망 워킹그룹은 2030년 전력수요를 100.5GW로 하향 조정했다. 전력수요 증가 요인이 크지 않은 상황과 최근 경제성장률(GDP) 전망이 낮아지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제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처럼 전력수요가 줄어든다면 발전설비를 필요 이상으로 더 지을 명분이 사라진다.
원전은 저렴한 에너지로 알려져 있다. 원자력의 발전단가는 1kWh당 50~60원대다. 석탄, LNG 등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저렴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비용은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다. 원전의 안전성이 강조되며 그 비용 역시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에 원전사고에 대한 비용이 추가되면 원자력 발전 단가 역시 오른다. 사용후핵연료는 10만 년에서 100만 년까지 관리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실제로 얼마나 들지도 알 수 없다. 더욱이 사용후핵연료 임시 저장시설의 임계치가 다가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월성은 2019년, 고리·한빛은 2024년, 한울은 2037년, 신월성은 2038년 포화를 앞두고 있다. 이와 같은 외부 비용을 포함하면 실질적인 원자력 발전단가는 가늠조차 어렵다.
에너지 절약 실천해 전력 소비 더 감축
에너지전환 로드맵은 기존의 에너지에 대해 갖고 있던 국민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동안 저렴한 에너지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생활습관이 형성된 경향이 있다. 이 시점에서 불필요한 전력 낭비를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올해 최대 전력은 여름에 있었지만 지난 2009~2015년 최대 전력은 모두 12월, 1월 겨울철에 발생했다. 에어컨 등으로 전력수요가 큰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발생하는 점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기현상이다. 전력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전기장판, 히터 등으로 난방을 하고 열 손실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소비 효율화, 단열 개선 등에 국민의 동참이 필요하다. 아울러 최고 수준을 보이는 산업용 전기 소비를 줄이기 위한 조정도 진행돼야 한다. 더 이상 냉·온풍기를 켠 상태에서 문을 열고 영업을 하는 업소가 없게 해야 한다. 2010년 이래로 전력 소비 증가율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에너지 절약 실천으로 전력 소비를 더 줄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원전은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큰 공헌을 했다. 원전은 싸고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국가주도형의 에너지 발전을 이뤄왔다. 국민의 의견이 반영될 공간이나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던 때다. 하지만 이번 에너지전환은 다르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를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결정했듯이 에너지 정책도 국민을 중심으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국민이 수용하고 참여하고 주도하는 에너지 정책이야말로 에너지전환 로드맵의 핵심이다.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에너지 분야에 부족했던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전환은 에너지 민주주의다.
정부, 영국·체코에 원전 수출 추진
정부가 원자력발전소 신규 건설을 추진 중인 영국과 체코에 원전 수출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1월 7~8일 파리에서 열린 2017 국제에너지기구(IEA) 각료 이사회 참석을 계기로 영국·체코 차관급 인사와 면담을 갖고 원전 수출 지원 계획을 전달하며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박원주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은 7일 체코 코바초프스카 산업통상부 차관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의 체코 원전 건설이 단순 시공 분야 협력에 머무르지 않고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사례와 같이 다양한 인력 교류, 기술 협력으로 이어지는 산업 전반의 장기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할 것임을 강조했다.
11월 8일에는 영국 리처드 해링턴 하원의원 겸 기업에너지산업전략부 차관과 면담을 갖고 한국의 원전 기술력을 강조하면서 우리 정부의 지속적인 원전 수출 지원 계획을 밝혔다. 박원주 실장은 “한국은 원전 건설 분야에, 영국은 원전 해체 분야에 강점이 있는 만큼 양국 간 협력 가능성이 높다”며 “향후 장관급 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협력 방안이 도출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어 9일 영국 런던에서 제레미 포클링턴 기업에너지산업전략부 에너지·안보실장을 면담하고 우리나라 기업의 영국 신규 원전사업 참여 방안 등을 추가 논의했다.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