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씨름의 희열’ 촬영 현장│KBS
민속씨름이 부활하고 있다. ‘몸짱’ 청년 장사가 나선 씨름대회 동영상의 조회 수가 200만 회를 뛰어넘고, 젊은 장사들에게는 ‘씨름돌’(씨름+아이돌)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경량급 선수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이 지상파 전파를 타면서 일부 선수들은 아이돌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화려한 기술과 근육질 몸매로 팬들을 모래판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설날을 맞아 화려하게 부활한 민속씨름을 조명해본다.
조명이 켜졌다. 원형의 모래판 양끝에 두 선수가 섰다. 심판의 신호에 맞춰 모래판 중앙으로 들어서는 두 선수 모두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들어 손의 땀을 닦는다. 두 선수가 꿇어 앉아 무릎을 맞댔다. 샅바를 잡는 팔뚝의 힘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밀착된 어깨와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에서는 벌써 땀이 흘렀다. “일어 섯!” 심판의 구호에 맞춰 일어서 허리를 굽힌 두 선수의 등 근육이 파도처럼 꿈틀거린다.
심판의 호각소리가 울렸다. 숨 죽이고 모래판을 응시하던 관객들도 함성을 지르며 선수의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한다. 선수와 일심동체가 되는 경험은 씨름만이 주는 매력이다. 들배지기, 안다리걸기… 승부는 잡채기에서 갈렸다. ‘와’ 하는 함성과 ‘아’ 하는 탄식이 엇갈리는 순간 승리한 선수는 모래를 집어 허공으로 뿌리며 포효한다. 소리를 내지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살아나 일어선다.
‘씨름의 희열’ 녹화장에 팬이 보낸 푸드트럭도 등장
1월 11일 서울 여의도
신관 공개홀에서 진행된 예능 프로그램 ‘씨름의 희열’ 4라운드 8강을 가리는 경기 녹화 현장은 일찍부터 선수들의 열정과 팬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방송 이후 처음으로 방청객 앞에서 진행된 경기였다.
이벤트 신청자는 5923명. 이 가운데 행운을 잡은 팬은 600명이다. 공개홀 주변은 오전부터 붐볐다. 한 씨름팬이 보낸 푸드트럭이 음료를 무료로 제공하는가 하면 ‘직관’의 행운을 잡은 씨름팬들은 선수들과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경기를 앞둔 시간이라 컨디션 관리를 위해 꺼릴만도 한 데 선수들은 너나 없이 씨름팬들의 사진촬영과 사인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씨린이’(씨름+어린이의 합성어)이의 어이없는 질문과 요구조차도 선수들은 고마워했다. “씨름을 사랑해주니 고맙지요. 늘 관객이 없는 경기장에서 경기를 해왔어요. 후배들은 그런 설움을 안 겪게 우리가 잘해야죠.” 선수들은 1억 원의 우승상금과 태극장사 타이틀 보다 씨름의 부활에 기여하는 것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2019 영암 추석장사 씨름대회│영암군
경량급 18명 선수 기술에 젊은 세대 매료
‘씨름의 부활’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 진 ‘씨름의 희열’ 참가 선수는 모두 18명이다. 대한씨름협회 랭킹시스템에 기준해 태백급(-80kg)과 금강급(-90kg)에서 각각 9명의 선수를 선발했다. ‘씨름의 희열’을 기획한 최재형 책임프로듀서(CP)는 “씨름에 대한 관심이 심상치 않다는 후배 PD들의 제안을 받아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며 “특히 대한씨름협회가 제작한 홍보동영상 ‘나는 씨름 선수다’를 본 뒤 씨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대한씨름협회 이승삼 사무처장은 지금을 씨름의 ‘제3 부흥기’라고 말한다. “첫 부흥기는 1972년 9월 24일 열린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입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체급에 관계없이 열린 경기입니다. 흑백텔레비전이지만 씨름이 방송으로 중계되면서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죠. 두번째는 컬러텔레비전과 함께 열렸죠. 씨름이 야구에 이어 두번째로 프로로 전환해 열린 천하장사대회였죠,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 부흥기입니다. 유튜브, 아프리카TV 등 개인방송을 통해 씨름이 다시 알려지고 예능과 결합한 새로운 시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보입니다.”
1983년 야구에 이어 두번째로 프로시대를 연 씨름은 말 그대로 국민스포츠였다. ‘이만가지 기술’ 이만기, ‘인간 기중기’ 이봉걸, ‘씨름판의 신사’ 이준희 등 걸출한 스타가 보여주는 씨름의 기술은 시대적 상황에 억눌린 국민의 가슴을 뚫어주는 청량제였다. 천하장사대회가 열리는 날에는 거리가 한산해지고 밤 9시 뉴스까지 씨름 중계에 밀려 제 시간에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씨름의 노래’ 후렴구 “천하장사 만만세~”는 애국가 만큼이나 온 국민이 즐겨 듣고 부르는 노래가 됐다.
남북 공동등재한 최초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씨름의 인기는 90년대에 들어서도 식지 않을 듯 했다. 그러나 19세 천하장사 강호동이 1992년 씨름판을 떠나면서 위기는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스타선수의 부재, 체중을 앞 세운 지루한 힘씨름, 승패에 연연한 경기 운영…. 씨름은 그렇게 인기를 잃어갔다. 여기에 외환위기로 위기를 맞은 기업들이 경영난 탓에 프로팀을 해체했다. 2005년 명문 씨름구단인 현대코끼리씨름단마저 팀을 해체하면서 씨름은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우리 유전자에 각인된 씨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부와 대한씨름협회의 씨름 부활을 위한 노력으로 씨름은 100대 민족문화상징으로 선정됐고 2012년에는 ‘씨름진흥법’도 제정됐다. 또 음력 5월 5일 단오날이 씨름의 날로 지정되는 성과도 거뒀다. 정부 차원에서 씨름진흥추진전담팀이 꾸려져 △유소년씨름 활성화 △씨름인구 저변 확대 △씨름의 전통문화 콘텐츠화 △씨름의 국제화 △씨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등 씨름진흥을 위한 노력이 잇따랐다. 이에 힘입어 2017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고 2018년에는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남북 공동 등재라는 성과도 거뒀다.
씨름을 스포츠 차원에서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함께 이뤄졌다. 체중에 기반한 힘 씨름을 기술 씨름으로 전환하기 위해 체중상한제를 도입해 140kg이 넘으면 경기에 출전할 수 없도록 했다. 밀어내기도 없애고 경기시간도 5분에서 1분으로 줄여 빠른 시름을 유도하고 있다. 기술 구현이 쉽도록 샅바도 여유있게 잡을 수 있도록 바꿨다. 국민이 직접 즐기는 생활체육 차원의 씨름도 장려해 씨름을 즐기는 생활체육인 수도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유튜브 등 개인방송을 중심으로 씨름의 인기가 되살아 난 것도 대한씨름협회가 홍보 동영상을 만들고 씨름인들 스스로 크리에이터로 나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다. 선수들은 훈련이 없는 날 길거리 씨름대회를 열거나 시범 경기를 통해 씨름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영암 추석장사대회 20년 만에 흥행사례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19년 9월 10일 전남 영암에서 열린 2019 추석장사씨름대회는 연인원 3만 명의 관중이 찾아 2000년대 이후 최대 흥행을 이뤘다. 씨름으로 단련된 근육질 몸과 잘 생긴 얼굴, 화려한 기술로 무장한 일부 선수들은 잡지 화보에 등장하면서 여심을 씨름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러한 인기를 씨름 부흥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씨름계가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이승삼 사무처장은 “대학 동아리 육성, 생활체육인과 동호회를 위한 씨름 경기장 건설, 유소년과 청소년 씨름 교실 등을 통해 씨름의 저변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여성씨름의 전국체육대회 정식 종목화도 추진중이다. 이제 씨름인들은 경기가 씨름의 성지 장충체육관에서 열리기를 바라고 있다. 씨름의 부활을 세상에 더 많이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글·사진 윤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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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