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일치의 길을 안내하는 혹은 드러내는 표징이며 도구라는 교회의 자기 이해에서 ‘세상사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의 생활’이 자리할 곳이 있을까?
천주교 서울대교구 전 정의평화위원장인 박동호 신부(서울 이문동성당)는 교회가 세상 밖의 고도(孤島)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 가운데 하나도 아니라고 했다. 교회가 이 둘 가운데 하나가 되려는 것은 ‘편안함’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 나아가 ‘위험’이라고까지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는 이 유혹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박 신부는 “교회와 세상(사회), 신앙과 현세의 사물 질서는 분리나 일체화가 아니라 상호 관여하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사회에 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야말로 현세적 야욕이 아닌 ‘인간의 구원과 인간 사회의 쇄신’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사회참여, 나아가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시선이 있다. 그러나 박 신부는 “가톨릭 사회 교리야말로 세상에 관여하는 교회의 대화 언어”라고 지적했다. 교회가 인간 존엄과 공동선에 대한 신념과 사명감을 갖고 정의와 평화, 화합을 위한 대화에 나서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종교의 이런 모습이야말로 부정과 부패, 분열과 갈등, 차별과 외면으로 상처받은 국민과 사회를 바로잡고 치유하고 통합해야 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마련한 제17회 가톨릭 포럼의 주제가 ‘2017년 대한민국, 정의와 화해를 위한 종교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염수정 추기경(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은 격려사에서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국민통합과 개혁의 열망이 가득하다”면서 “정의와 화해를 위한 종교와 신앙인들의 노력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의와 자비, 사랑과 평화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고, 국민이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 ‘모든 이의 모든 것’(코린 9장 22절)이 돼주기를 기도했다.
그렇다면 종교적 화해란 무엇인가? 박동호 신부는 정의와 자비이며, 또한 사회와 정치 차원의 애덕(愛德)이라고 했다. 화해와 사랑이 개인적·인격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이웃이 억압받고 상처받고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기 위해 애쓰는 사랑의 행위인 사회적 차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5년 12월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면서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강조했다. 그는 돈에 눈이 어두워 부패를 저지르는 것은 개인과 사회를 곪게 하고, 약자의 계획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느님을 ‘돈이 권력의 한 형태’라는 허상으로 대치시키는, 그래서 ‘하늘에 복수를 절규하는 무거운 죄’라고 했다.
우리 국민은 지난겨울 부패는 어둠의 작업으로서 의혹과 음모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교황이 강조한 “부패를 개인과 사회생활에서 몰아내기를 바란다면 그 어떤 부정행위도 고발할 수 있는 용기와 함께 현명함, 경계심, 정직성과 투명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광장의 수십만 촛불이 증명해 보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정의와 자비(화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공동체 선을 이룩해야 한다. 교황은 “이 둘은 모순적인 두 실재가 아니라 한 실재의 두 차원”이라고 했다. 이 실재는 사랑의 충만함에서 그 절정에 이를 때까지 점진적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종교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정의평화위원장인 남재영 목사도 ‘정의와 화해’에는 “촛불혁명의 요구인 우리 사회 적폐청산이라는 과제와 함께 새로운 나라와 사회를 세우기 위한 여정의 의미가 있다”면서 “거기에는 복음서의 가르침인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상징되는 종교의 사회적 책임도 포함된다”고 했다. 화해는 정의와 평화, 생명과 분리될 수 없으며, 정의가 과정이라면 화해는 결과이고 정의는 화해를 위한 대전제라는 것이다.
물론 정의를 외면한 화해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또 다른 죄악이다. 때문에 남 목사는 화해를 위한 대전제이자 과정으로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종교의 역할로 “회초리를 들어 자본의 종아리를 내리치고, 작은 이들, 특히 자본에 내몰린 이들이 눈물 흘리는 자리에서 함께 비를 맞으며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대형 마트처럼 지나치게 자본의 논리에 빠져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위로와 나눔의 쉼터인 작은 교회를 몰아낸 한국 교회, 특히 대형 교회에 대한 질타이자 뼈아픈 반성이기도 하다.
불교라고 다를 리 없다.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장) 역시 불의의 세력을 전제로 한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상극을 넘은 상생을 강조했다. 그것이 바로 원효가 말한 ‘화쟁(和諍)’이며, 이는 붓다가 걸어간 공평무사한 종교 본연의 길인 ‘오래된 미래의 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툼을 화해시켜 다 함께 생명 평화의 삶을 이룩하는 화쟁을 이룰 수 있는 기적의 길은 무엇일까? 도법 스님이 제시한 답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바로 ‘대화’다. 대화는 더불어 함께하도록 하는 지도력의 핵심이며, 너도나도 함께할 수 있도록 진실을 찾고 드러내는 과정이며, 삶의 문제를 풀고 희망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도구라는 것이다. 한 몸, 한 생명의 관점에서 서로 원한을 풀고 상생하는 평화와 공동체의 21세기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그 길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 길에 종교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종교 스스로 성찰이 필요하다. 정의와 화해, 치유와 상생, 자비와 봉사의 가치를 부정하는 종교는 없다. 그런데 과연 우리 종교는 그것을 용기 있게 실천했는가. 종교 간, 교파 간 벽을 쌓고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면서 세속적인 욕망과 안락에 집착해온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하는 2017년, ‘대한민국의 정의와 화해를 위해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아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진솔하게 응답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