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산업·기술의 시장 출시를 불합리하게 막는 규제를 유예 또는 면제하는 ‘규제 샌드박스(규제 유예)’ 제도가 시행 1년을 맞았다. 규제 샌드박스란 모래 놀이터에서 안전하고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처럼 신기술·신산업 시도가 가능하도록 일정 조건에서 규제를 면제·유예시켜주는 제도다. 정부는 지난 1년간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195건을 승인해 기존 목표(100건)의 2배 가까운 성과를 이뤘다.
규제 샌드박스 1년 성과로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가 창출됐다는 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정부는 “외국은 실증 테스트 중심인 데 반해 우리는 규제 신속확인, 임시허가, 실증특례 등 규제혁신을 위한 3종 세트를 완비했다”고 설명했다. 외국의 경우 실증 테스트 중심, 금융 분야 위주로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정보통신기술(ICT)·산업융합·지역혁신 등 산업 전반을 포괄해 규제 샌드박스를 매우 광범위하게 시행 중이다. 외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가장 짧은 기간에 규제 샌드박스 최다 적용 사례를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의 평균 심사 기간은 50일로 통상 6개월 걸리는 외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반면 승인 규모는 외국에서 가장 많은 승인 사례를 낸 영국(연 40여 건)의 4배에 이른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를 혁신성장의 실질적 성과로 연계하기 위해 2020년 한 해 승인 건수를 200건 이상으로 확대하는 등 제도 안착에 속도를 내고 있다. 또 규제혁신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경우 부처별 갈등조정위원회에서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기로 했다.
성과 및 개선 방안
정부는 1월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규제 샌드박스 제도 시행 1년의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정부는 2019년 1월 17일 규제 존재 여부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 신속확인’, 규제 적용 없이 제품·서비스 시험을 허용하는 ‘실증특례’, 시장 출시를 일시 허용하는 ‘임시허가’ 등 규제 샌드박스 3종 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정 총리는 이날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2019년에만 195건의 특례를 승인하는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과감한 혁신에 목말라하고 있다”며 “정부는 2020년 경제·민생·공직의 3개 분야 중심으로 규제혁신에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신기술 사업화와 신속한 시장 출시 지원에 방점을 둬 규제 샌드박스의 질적 도약을 이루고, 공유경제나 의료·바이오, 데이터 활용 등의 ‘빅 이슈’는 사회적 대화로 갈등을 해소하며 신성장 동력으로 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 정립
정부는 실증특례 중심인 외국에 비해 규제 신속확인·임시허가·실증특례 등 폭넓은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의 모델을 정립했다고 평가했다. 규제 샌드박스의 과제 접수부터 심사까지 평균 50일이 걸려 영국, 일본 등 외국(평균 180일)보다 3배 이상 빠른 심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또 정보통신기술(ICT) 융합, 산업융합, 금융혁신, 지역혁신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시행하고 있다.
2019년 한 해 동안 승인받은 규제 샌드박스 195건을 분석한 결과, 분야별로는 금융혁신(39%), 정보통신기술 융합(21%), 산업융합(20%), 지역혁신(20%) 순이었다. 유형별로는 실증특례(81%), 임시허가(11%), 적극행정(8%) 순으로 제도 승인이 이뤄졌다. 기업의 규제 여부 문의에 30일 이내 회신하지 않으면 규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규제 신속확인’은 모두 180건이 처리됐다.
승인기업의 70%는 중소기업으로, 규제 샌드박스가 신생기업과 벤처기업 혁신의 실험장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은 26%, 대형 금융기관은 11%, 공기업은 4%였다. 기술별로는 승인기업의 약 60%가 앱(App) 기반의 플랫폼 기술을 활용하고 있었다. 나머지도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블록체인,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신기술을 활용한 과제들이었다. 특히 승인받은 195건 가운데 58개(30%) 과제가 시장에 출시돼 21개 기업이 2500억 원의 신규 투자를 유치하고 20여 개 기업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등 승인기업의 신제품·신서비스의 시장 진출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
승인기업 90% “제도에 만족”
네 가지 식용색소를 활용해 똑같은 컬러 이미지를 라테 표면에 입히는 ‘라테아트 3D(3차원) 프린터’는 2년 동안 식품위생법에 막혀 시장에 나올 수 없었으나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한 뒤 4개월 만에 출시될 수 있었다. ㈜대영정보시스템은 사용하려는 식용색소가 과일·채소 음료, 탄산음료, 일부 주류와 커피용 시럽에는 사용할 수 있는 식품인데도 커피에는 쓸 수 없다며 임시허가를 신청했다. 2019년 7월 열린 제4차 산업융합 규제특례심의위원회는 식용색소를 커피 표면 장식에만 kg당 0.1g 이하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임시허가를 내줬다. 이후 국내 시장에 출시된 라테아트 3D 프린터는 일본, 대만, 베트남 등 해외시장 수출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산업융합 규제 샌드박스 1호로 2019년 9월 문을 연 ‘국회 수소충전소’는 같은 해 12월 2154대가 이용하는 등 월평균 이용자는 34%, 매출은 41% 증가했다. 각종 고지서를 휴대전화에서도 볼 수 있게 바꿔주는 ‘모바일 전자고지’는 15개 기관에서 59종의 고지서를 모바일로 전환해 79억여 원을 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19년 11월 14일부터 21일까지 실시한 규제 샌드박스 만족도 조사에서 승인기업의 90.2%가 규제 샌드박스 제도에 만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우 만족한다’와 ‘어느 정도 만족한다’는 기업이 각각 45.1%로 가장 많았고, ‘별로 만족하지 않는다’와 ‘전혀 만족하지 않는다’는 기업은 7.8%와 2.0%였다. 일반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규제 샌드박스가 규제완화(86.2%), 경제 활성화(80.6%), 적극행정 유도(51.2%) 등 혁신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내다본 기업이 많았다.
한 해 200건 이상 승인 목표
정부는 앞으로 연 200건 이상의 승인 사례가 나오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다양한 보완책을 마련했다. 먼저 정부는 기업이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더욱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별도의 민간 접수기구를 설치하기로 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안에 ‘규제 샌드박스 지원센터’를 신설해 규제 샌드박스 신청 접수뿐 아니라 법률 자문과 컨설팅, 부처 협의 등 전반을 지원한다. 지원센터는 3개월 동안 시범 운영을 거친 뒤 상설 운영체제로 확대 전환하고, 대한상공회의소와 지역상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기업 지원 기능도 강화할 계획이다.
또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에 대해서는 갈등조정 체계를 구축한다. 심의 과정에서 갈등 조정이 필요할 경우 주관 부처별로 ‘갈등조정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하도록 했다. 위원회에는 부처 관계자와 이해관계자, 전문가, 신청 업체 등이 참여한다.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의 ‘규제·제도혁신 해커톤(끝장 토론)’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한다. 심사 기간도 크게 줄이고, 모든 부처에 규제 샌드박스 전담 부서를 설치한다. 특히 유사하거나 동일한 사안에 대해 적용하는 ‘신속처리 제도’를 보강해 기존 특례 사업과 사업 모델이 동일할 경우 접수부터 승인까지 걸리는 기간을 1개월 이내로 단축한다. 실증사업 범위 관련 조건을 변경할 때 적용하던 최소 실증기간(6개월)도 폐지하고, 소관 부처에 조건 완화 권한을 부여하는 등 심사의 신속성을 높인다.
법령 미비로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관련 법령을 조속히 개정한다는 원칙도 재확인했다. 신청 사업이 임시허가를 받으면 관련 법률을 6개월 안에 국회에 제출하고 하위 법령은 3개월 안에 개정한다는 원칙을 적용하되, 법령 정비가 지연될 경우 특례를 연장해주기로 했다. 공공기관의 시제품 구매를 독려하는 등 해당 기업의 빠른 시장 안착 방안도 마련했다.
규제 샌드박스 승인 제품에 대해서는 핵심 심사 절차인 혁신성 평가를 면제하고 수의계약을 허용해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서비스의 초기 수요를 공공기관이 견인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승인기업의 초기 사업자금 확보를 위한 각종 자금·세제 지원도 확대한다. 금융 규제 샌드박스 승인기업 전용 펀드를 4년 동안 3000억 원 규모로 조성하고, 기업이 규제 샌드박스 제품 관련 사업으로 재편할 경우 자금·세제 등의 ‘패키지’ 지원을 한다. 이 밖에 ‘선(先)적극행정, 후(後)규제 샌드박스’ 원칙을 적용해 기업이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신청하면 정부 부처는 ‘적극행정’을 펼쳐 특례 없이 현 제도에서 즉시 개선이 가능한지를 먼저 검토하도록 할 계획이다.
원낙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