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호 공유주방 청년창업가로 선정된 변혜영(왼쪽) 씨와 엄태훈 씨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 내 즉석간식 코너. 오후 8시가 되자 ‘청년희망 나이트카페’(이하 나이트카페)라는 간판에 불이 켜진다. 간판 불이 켜지면서 가게 주인과 메뉴도 바뀐다.
6월 20일 오픈한 나이트카페의 운영자는 변혜영(33) 씨다. 임상병리사로 일했던 그는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됐다. 재취업은 녹록지 않았다. 낮엔 네 살배기 아들을 돌봐야 해서 저녁 시간에만 할 수 있는 일자리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카페 등 창업도 고려했으나 초기 투자비용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는 게 부담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도로공사의 ‘청년희망 Night-cafe 청년창업매장 창업자 공모’(이하 공모)를 보게 됐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매장 공간 및 조리설비 등을 주간시간대 사업자와 공유해 야간시간대에 매장을 운영할 청년 창업자를 뽑는 내용이었다.
공모에 선정돼 운영하게 된 곳이 바로 나이트카페다. 4년 만에 다시 일자리를 찾은 변 씨는 “요즘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저녁엔 퇴근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 뒤 일터로 향한다. 매장 운영 시간은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드립 커피, 소떡소떡(소시지와 떡을 차례로 꽂아 만든 꼬치), 핫도그 등을 판매한다.
문을 연 지 이제 한 달여 남짓, 보통 오후 7시 30분경 휴게소에 도착해 주간시간대(오전 8시~오후 8시) 운영업체 직원에게 인수인계 등 설명을 듣고, 오픈 준비를 하느라 바쁜 요즘이다.
이 매장 메뉴판 위에는 ‘규제특례 공유주방 1호점’이라고 적힌 특별한 문패가 걸려 있다. 한 공간을 두 사업자가 나눠 쓰는 ‘공유주방’은 정부의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가능해진 사업 모델이다. 규제 샌드박스란 기존 시장에는 없었던 창의적·혁신적인 새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기존 규제에 발목 잡혀 지체되거나 무산되는 일이 없도록, 일정 조건 아래 기존 규제를 면제 혹은 유예해주는 제도다. ‘샌드박스’라는 명칭은 아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게 만든 박스 형태의 모래놀이터(sandbox)에서 유래했다.
▶나이트카페의 메뉴판│ 문화체육관광부 스토리랩 기자 임경연
“경력 단절 뒤 다시 일자리 찾아 행복”
공유주방은 주방 하나를 정해진 시간만큼 임대하거나, 대형 주방을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나눠 쓰는 것을 뜻한다. 임대료나 인테리어 비용 등 초기 투자비용 부담이 적어 창업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다. 자금이 부족한 청년들에게 창업 도전의 기회를 주는 등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행 식품위생법에 따라 1개 주방에 2인 이상의 사업자가 영업을 하는 건 불법이다. 1개 주방을 여러 사업자가 함께 사용하면 교차오염 등 위생관리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시카고 등), 인도 등에서 공유주방과 관련한 다양한 사업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4월 29일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의 일환으로 규제 적용 없이 서비스의 실험을 허용하는 실증특례 대상에 한국도로공사가 신청한 공유주방을 포함하기로 했다. 이로써 2년 동안 2곳의 고속도로 휴게소 매장을 공유주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중 한 곳이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에 있는 변 씨의 나이트카페다.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 내 나이트카페를 운영하는 청년창업가 변혜영(왼쪽) 씨가 주간시간대 운영업체 직원에게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한국도로공사
변 씨는 무엇보다 초기 투자비용에 대한 부담을 덜고 창업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손꼽았다. 통상 초기 투자비용 4600만 원이 필요했지만, 도로공사가 임대료를 면제해줘서 오로지 식자재 비용만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기존 영업자의 영업관리 노하우 및 식품안전 기술을 습득하는 등 일종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공유주방의 장점이다. 변 씨는 “낮에 근무하는 직원분들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셔서 배워나가며 일하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나이트카페 덕에 저녁 시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나 간식거리를 찾던 운전자들도 반색하고 있다. 여름 휴가철 고속도로 이용자가 늘면서 매장을 찾는 이들도 그만큼 늘어나는 분위기다. 변 씨는 “가장 반응이 좋은 메뉴는 ‘소떡소떡’”이라며 “문패를 보고 공유주방에 대해 물어보는 손님들께 설명해드리면, ‘그런 좋은 정책이 있었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휴게소 내 공유주방 매장을 운영하게 된 변 씨에게 이번 기회는 특히 더 소중하다. 변 씨는 “그동안 사회생활에 정말로 복귀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며 “돈을 번다는 사실도 좋지만 다시 사회로 나와 내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존감도 크게 향상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이런 사업이 더 확장돼 나처럼 창업을 하고 싶어도 초기 투자비용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이나 육아 등으로 풀타임 근무가 어려운 이들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 내 즉석간식 코너. 오후 8시가 되자 나이트카페 간판 불이 켜졌다.│한국도로공사
“사업 노하우 익혀 내 가게 창업 목표”
경기도 안성시 안성휴게소(부산 방향)에 가면 또 다른 나이트카페가 오후 8시부터 불을 켠다. 대학교 4학년생 엄태훈(26) 씨가 운영하는 매장이다. 그는 변 씨처럼 커피에 관심이 많아 커피매장 창업을 알아보다 공모를 보고 지원했다. 엄 씨는 “자본이 충분하지 않은 청년들 입장에서 창업을 하는 게 여러모로 부담이 큰데, 이번 기회를 통해 창업 경험을 해볼 수 있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핸드드립 커피 판매만 생각했는데 낮에 인기 있는 메뉴 몇 가지를 함께 팔면 좋겠다는 생각에 추러스, 핫도그, 소떡소떡 등도 판매하고 있다.
엄 씨 역시 공유주방의 매력으로 초기 투자비용에 대한 부담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엄 씨의 경우 650만 원 정도의 통상 초기 투자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매장 운영 시 위생관리 등에도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 엄 씨는 “주간시간대 휴게소 운영업체 측과 저 모두 위생교육 등을 받고, 매일매일 위생 점검 일지도 적는다”고 말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공유주방과 관련해 안전관리 대책 등도 마련했다. 먼저 공유주방 설치 운영자 측에서는 식품 분야 대학 졸업생이거나 자격증 소지자 또는 2년 이상 종사자 등 ‘위생관리 책임자’를 두고 주방시설, 조리시설 등의 위생관리 상태를 매일 점검해야 한다. 공유주방 사용자는 교차오염 방지, 위생적인 제품 생산 등을 위해 식약처에서 제공한 ‘공유주방 운영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한다. 식약처와 지방자치단체는 주기적으로 현장 지도, 운영상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등 관리를 해야 한다.
▶즉석간식 코너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기존의 휴게소 운영업체가 운영한다.│문화체육관광부 스토리랩 기자 임경연
엄 씨는 “2년간 실증특례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큰 책임감을 안고 일하고 있다”면서 “2년 동안 열심히 운영해서 돈도 모으고, 사업 노하우도 익히고 싶다. 이 경험을 밑천 삼아 내 가게를 창업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7월 11일에는 제1호 공유주방인 나이트카페에 이어 ‘제2호 공유주방 시범사업’이 신기술·서비스 심의위원회(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관)의 최종 심의를 통과했다. 심플프로젝트컴퍼니(위쿡)가 신청한 이 공유주방은 제1호 공유주방(고속도로 휴게소)과 달리 1개의 주방을 여러 명의 영업자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받아 다양한 제품이 한 공간에서 생산될 수 있는 형태다. 제1호 공유주방처럼 앞으로 2년간 영업신고 규제특례를 적용받게 된다. 한편 심의위원회는 공유주방에서 생산된 제품을 유통기한 설정 실험·자가품질검사·식품표시 등 안전 의무를 이행한 경우에 한해 유통·판매(기업 간 거래-B2B)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김청연 기자
▶6월 20일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에서 제1호 공유주방 개장 행사가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 스토리랩 기자 임경연
승인 81건 중 80% 중소기업, ‘혁신 실험장’
신산업·신기술 규제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문재인정부에서 새롭게 도입한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 6개월 만에 올해 정한 목표의 80%를 달성했다. 정부는 7월 16일 규제 샌드박스 시행 6개월 만에 올해 목표인 100건 가운데 총 81건의 과제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 초기인데도 심사절차 간소화를 위한 ‘패스트트랙 심사 제도’를 도입하고, 부가 조건을 최소화해 실증 기회를 최대한 보장하는 등의 심사를 통해 연간 목표의 초과 달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규제 샌드박스의 과제 접수부터 심사까지 평균 44일이 걸려 영국, 일본 등 외국(평균 180일)보다 더 빠른 심사가 이뤄졌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규제 샌드박스 과제 중 이미 시장에 출시되거나 실증 테스트에 착수학 과제는 14%(11건)이며, 7월 말 36%(29건), 연말까지는 98%로 확대될 전망이다.
승인된 과제 81건 중에는 혁신금융 관련 사례가 46%(37건)로 가장 많았고 산업융합(32%), ICT 융합(22%) 등이 뒤를 이었다. 주관부처별 승인 건수는 금융위원회(46%), 산업통상자원부(32%), 과학기술정보통신부(22%) 순이었다. 규제부처별 승인 건수는 금융위(43%), 국토교통부(12%), 식품의약품안전처(12%), 산업부(10%), 보건복지부(7%)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핀테크, 교통, 보건의료, 에너지 분야 신기술이 활성화하면서 나온 결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업종 분야별로 보면 금융(46%), 의료(14%), 제조(11%), 전기·전자(10%) 순, 기타 통신, 에너지, 광고, 물류 등 산업 전반으로 규제 샌드박스 승인이 고르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형별로는 기존 규제 적용 없이 테스트를 허용하는 실증특례가 72%(58건)로 가장 많았다. 유연한 법령해석과 정책권고 등 적극행정을 통한 문제 해결 사례도 16%(13건)를 차지했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오래전부터 이해관계자 간 갈등 등으로 장기간 교착상태에 있던 과제들이 해결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도 설명했다. 손목시계형 심전도 장치를 활용한 심장관리 서비스가 원격의료 행위 전면 제한에 따라 4년간 시장에 출시되지 못하다가 제한적 범위에서 실증특례를 허용받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기업 규모별로 볼 때 중소기업이 전체의 80%를 차지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가 매출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 기업·벤처기업의 혁신 실험장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4차 산업혁명의 융복합 기술 전반에 걸쳐 사업화가 시도되고 있다는 점도 도드라졌다. 신기술 분야로 보면 애플리케이션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 기술이 50% 이상을 차지했고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블록체인, 인공지능(AI) 기술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 시행 6개월을 맞아 추가 보완 과제를 마련하기로 했다. 먼저 규제 샌드박스에 통과한 스타트업 기업의 ‘성장 프로그램’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우수 조달물품 신청자격 부여, 자금 공급 확대, 시장개척 멘토링 등을 시행해나가기로 했다. 또 특허출원 시 ‘우선심사’ 대상으로 처리하고, 특허분쟁의 신속한 해결을 지원하는 등 특허권 관련 종합 지원체계도 마련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