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유럽순방으로 각국 정상들에게 강조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는 한반도 평화였다. 2018년 들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군사 분야를 포함한 남북관계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북미정상회담으로 관계 정상화와 비핵화에 합의한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 대통령의 이번 유럽순방을‘평화외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순방을 통한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외교는 세 가지 트랙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 번째 트랙은 교황청을 상대로 한 한반도 평화외교이다. 문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과 비공개 단독 면담을 가진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방북 초청 의사를 전달했고 교황은 공식 초청장을 요청하면서 평양을 방문할 수 있다는 긍정적 답변을 내놓았다. 문 대통령이 교황과 면담한 다음 날,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도 바티칸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교황이 평양을 방문할 의향을 밝혔다”고 교황의 발언을 재확인했다.
내년 중 교황의 북한 방문이 성사된다면 이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목표로 진행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교황의 방북과 김정은 위원장 면담은 북한이 지금까지 밝혀온 비핵화 의지를 국제사회에 공인화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북한의 불가역적 비핵화 의지를 정치적으로 공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북한 내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인권 현실 개선 필요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기회로도 작용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중요한 동력
북한의 공식 초청장이 전달되더라도 교황의 방북이 현실화되는 데는 최소한 6개월 정도의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교황이 문재인 대통령과 면담을 통해 전달받은 방북 초청을 수락한 사실만으로도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교황의 방북 수락은 북핵 문제를 다루는 데 제재와 압박 일변도가 아닌 대화와 중재를 통한 접근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 세계를 무대로 평화와 화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아온 교황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한반도에서 평화프로세스를 추진 중인 한국 정부의 노력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힘으로써 문재인정부의 대북 접근 방식에 힘을 실어준 것은 이번 유럽순방의 최대 성과로 꼽을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순방을 통해 펼친 평화외교의 두 번째 트랙은 유럽 주요 국가 지도자들과의 양자 정상회담이었다. 문 대통령은 유럽순방 기간 동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주요국 정상들과 잇따라 회담을 갖고 비핵화 및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및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논의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두 정상과 가진 회담에서 북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핵화를 진척시키면 유엔 제재의 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럽순방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 진전을 전제로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정부가 비핵화 프로세스의 속도를 내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평양공동선언에서 미국의 상응조치를 전제로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 용의까지 밝혔지만 종전선언과 같은 미국 측 상응조치의 시기와 내용을 둘러싼 논의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내 종전선언’이라는 기존의 목표에 더해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밝힌 바 있는 비핵화 조치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대북제재 완화를 통해 북한이 경제 집중 노선에 주력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다는 시그널을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순방에서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한반도 평화 구상의 중요성을 역설한 세 번째 트랙은 제12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라는 다자간 정상회의 무대였다. ASEM은 아시아 20개국과 유럽 31개국 및 2개의 지역기구(EU 및 아세안)가 함께 참여하는 초대형 다자기구다.
이번 ASEM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세션 첫 번째 일반발언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의 연계성을 완성하는 요소가 한반도의 평화이며 한반도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공동번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정상회의 이후 ASEM은 의장성명을 통해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및 북미 간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완전하고 신속한 이행을 촉구했고 비핵화와 관련해서는 기존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만남은 물론 유럽 주요국 지도자 및 EU 상임의장과 정상회담, 그리고 ASEM 정상회의 참석 등을 통해 시종일관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에서 유럽이 핵심 당사자는 아니지만 일단 비핵화 과정이 시작되고 나면 유럽 국가들이 이바지할 수 있는 분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 공고화
우선 EU 회원국 중 7개국이 북한에 상주공관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향후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실현을 바탕으로 경제개혁과 개방에 나설 경우 유럽 국가들은 중요한 파트너의 역할을 떠맡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EU의 대외정책이 ‘비판적 관여(critical engagement)’라고 불리는 것처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인권과 교육, 건강 등 보편적 권리를 중요시하면서도 억지력에 기초한 군사적 방식이 아닌 대화와 협상을 중심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가 계속되며 대북 압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특사를 파견했을 당시에도 EU 측은 북핵 문제 해결에서 한국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북한을 향해서는 조속히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 바 있다.
특히 EU는 이란 핵협상을 주도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핵화 과정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과거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이란 핵협상에서 얻은 교훈과 경험을 공유하고 협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1994년 북미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어 북한에 경수로 지원 사업을 펼칠 때도 EU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국으로 참여해 11년(1995~2006)간 전체 사업비의 5.6%에 해당하는 1억 2330만 달러를 지원한 바 있다.
이렇듯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이행의 중요한 동반자로서 EU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감안할 때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유럽순방은 비핵화 과정뿐만 아니라 비핵화 이후를 내다보면서 한국과 유럽 국가들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공고히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기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