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비(Derby)’라는 스포츠 용어는 축구 종가 영국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중엽 영국 중부에 있는 소도시 더비를 연고지로 하는 두 팀인 ‘세인트 피터스’와 ‘올 세인츠’가 기독교 사순절 기간에 축구 경기를 펼쳤는데 이게 지금 ‘더비’ 매치의 시초가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즉 더비라는 말은 원래 한 도시를 함께 연고지로 사용하고 있는 두 팀 간의 대결을 뜻하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더비 매치가 많다. 잉글랜드에서는 리버풀과 에버턴이 격돌하는 ‘머지사이드 더비(머지사이드는 두 팀의 연고지가 있는 리버풀이 속한 주의 이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가 싸우는 ‘맨체스터 더비’, 아스널과 토트넘이 맞붙는 ‘북런던 더비’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이탈리아의 ‘밀란 더비(AC 밀란과 인터 밀란)’, 스코틀랜드의 ‘올드펌 더비(셀틱과 레인저스, Old Firm은 오랜 동료라는 뜻으로 두 팀은 글래스고를 연고지로 한다)’도 명성이 높다.
그런데 한국 프로축구(K리그)에서는 그동안 더비라는 용어가 좀 더 ‘광역화’되어 쓰였다. FC서울과 수원삼성의 ‘슈퍼매치’, 울산과 포항의 ‘동해안 더비’ 등이 K리그의 대표적인 더비 매치로 통했다. 또 전북과 전남의 경기를 ‘호남 더비’로 부르기도 했고 서울과 인천의 대결을 ‘경기 더비’로 칭하기도 했다. 심지어 같은 모기업(포스코)을 두고 있는 포항과 전남의 경기를 ‘제철가 더비’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 5월 14일 오후 경기 수원시 장안구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6 수원FC와 수원삼성의 경기에서 역전골을 기록한 수원삼성 염기훈이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한 도시를 연고지로 사용하는 두 팀 간의 대결 의미
국내 프로축구 K리그에서는 그동안 없었다고 봐야
올 시즌 들어서는 시민구단인 성남FC와 수원FC가 첫 맞대결을 앞두고 양 팀의 구단주인 이재명 성남시장과 염태영 수원시장이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진 팀의 홈구장에 이긴 팀의 깃발을 내걸자’는 내기를 성사시키자 언론에서 이 매치업을 두고 ‘메이어(시장) 더비’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K리그의 2부 리그인 챌린지에서도 안산 제종길 시장과 안양 이필운 시장이 안산 무궁화와 안양FC의 시즌 첫 경기를 앞두고 역시 ‘진 팀 시장이 이긴 팀 유니폼을 입고 하루 동안 업무를 본다’는 내기를 성사시켜 ‘제2의 메이어 더비’라는 소리를 들었다. 1 : 2로 진 안양 이필운 시장은 안산 유니폼을 입고 시장실에서 집무하는 사진을 ‘증거’로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K리그에서 더비라는 용어가 전통적인 의미(한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두 팀의 대결)를 넘어 ‘(한 도시가 아닌) 지역 라이벌’이나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팀 간의 대결’과 같이 광역화되어 사용된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첫째는 과거에는 전통적인 의미로 더비라는 명칭을 붙일 경기가 없었다. 즉 한 리그 안에서 한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복수의 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난 시즌까지 2부 리그에 있었던 수원FC가 올해 1부인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해 수원삼성과 지난 5월 14일 맞대결을 펼친 것이 진정한 의미의 K리그 첫 더비라는 해석이 많이 나왔다. 두 팀은 수원시를 함께 연고로 쓰면서 수원월드컵경기장(수원삼성)과 수원종합운동장(수원FC)을 각각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두 경기장의 거리는 2.5km에 그친다. 양 팀의 역사적인 첫 경기는 수원종합운동장에서 벌어졌는데 수원삼성의 서포터들은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집결해 2.5km를 거리행진한 뒤 종합운동장에 입성했다. 향후 두 팀 간의 경기에서는 이런 행태가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 또 양 팀의 엠블럼을 함께 넣은 기념 머플러도 매진을 기록했다. 1만2000여 명에 육박하는 관중이 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워 ‘사상 첫 더비’의 성공 가능성을 널리 알린 것도 인상적이었다.
30년이 넘는 K리그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복수의 구단이 같은 도시를 연고지로 사용한 적이 있기는 하다. 유공(현 제주)과 LG(현 서울), 일화(현 성남) 등 3개 구단이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지금은 사라진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공동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이들 팀의 경기는 자연스럽게 동대문운동장에서 자주 벌어졌다. 다만 이 경기를 프로축구 역사가 더비로 기록하지는 않는 듯한 분위기다.
당시는 프로축구 초창기여서 연고 개념도 희박했고, 제3의 도시에서 경기를 하는 유랑극단식 운영도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LG는 모기업의 연고가 있는 진주에서 경기를 자주 했다. 당시 LG구단 프런트로 일했던 한웅수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은 “당시엔 연고지가 있긴 했지만 유랑극단처럼 다른 도시를 옮겨 다니며 경기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기록을 살펴봐도 세 구단이 제주, 구미, 춘천 등 전혀 연고지가 아닌 도시에서도 경기를 벌였다. 이들 팀 간의 경기를 ‘더비’였다고 부르기 어려운 이유다.
▶ 5월 14일 오후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6 수원FC와 수원삼성의 경기에서 수원FC 레이어가 슛을 시도하고 있다.
흥행 성공 위한 광역화된 더비는 성공 못해
‘수원 더비’ 시작으로 제2, 제3의 더비 매치 만들어야
더비라는 용어가 광역화돼 사용된 두 번째 이유는 흥행을 위해 언론이나 구단에서 의도적으로 라이벌전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호남 더비의 경우 두 구단의 단장이 양 팀 간 대결을 ‘호남 더비’로 명명하자고 양해각서(MOU)를 쓴 뒤 한동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두 팀이 프레시즌 매치를 가질 정도로 의도를 갖고 지역 라이벌전을 개척한 사례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작위적인 더비’가 가진 한계였다. 포항과 울산의 ‘동해안 더비’도 두 팀의 역사적 위상을 볼 때 충분히 라이벌전의 가치가 있지만, 양 팀의 골수팬들이 서로를 더비로 강렬하게 의식하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이런 실질적인 세부 내용까지 따져본다면 지금까지 K리그에서는 서울과 수원의 ‘슈퍼매치’가 거의 유일하게 더비라는 용어에 부끄럽지 않은 경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 K리그에서는 ‘수원 더비’의 출범을 계기로 제2, 제3의 더비 매치를 만드는 공통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챌린지에 있는 서울이랜드FC가 조만간 클래식으로 승격하면 ‘서울 더비’가 현실화될 개연성이 아주 높다. 두 팀은 강북과 강남을 각각 연고지로 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가시화되고 있는 서울 더비 이후에도 과연 더비가 가능할지는 중•장기적인 숙제로 남아 있다.
3부 리그 격인 내셔널리그까지 포함한다면 한 도시에 복수의 클럽이 존재하는 도시는 부산(부산아이파크와 부산교통공사), 울산(울산현대와 울산현대미포조선), 창원(경남FC와 창원시청), 대전(대전시티즌과 대전코레일), 강릉(강원FC와 강릉시청) 등 5곳이나 된다. 당장 1부 리그인 클래식에서의 더비는 힘들다고 해도 내셔널리그에서 2부인 챌린지로 올라와 더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수원FC가 바로 내셔널리그에서 시작해 2부를 거쳐 클래식까지 올라온 사례를 만들었다. ‘수원FC 모델’이 제3의 더비가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는 뜻이다. K리그에서 더 많은 더비가 풍성하게 펼쳐졌으면 좋겠다.
글 · 위원석 (스포츠서울 체육1부 부장) 2016.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