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며느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다큐의 첫 장면은 더 이상 설날이나 추석에 시댁에 가지 않기로 선언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코멘트였다. 아이가 생긴 후,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남편만 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도 함께 갈 것인가의 문제로 비약됐기 때문이다. 중간에 선 남편은 시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중재도 못한 채 진땀을 빼고 있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익숙한 장면이다. 이젠 명절 즈음해서 이혼율이 올라간다는 기사는 놀라울 것도 없으니 말을 말자. 집단 토크쇼의 주제로 명절증후군이 등장한 건 오래다. 하지만 딱히 시원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해왔다. 하지만 명절 문화만큼은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런 생각에는 변화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있다. 우리는 대개 변화를 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가령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사표를 낸 후, 창업한 회사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IT 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의 이야기 같은 게 그렇다.
변화 하면 ‘개과천선’ 같은 단어를 떠올리는 것도 그런 의미일 거다. 하지만 변화란 우리 편견과 달리 빠르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노력하면 일보 진전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뒤로 후진하는 게 변화의 본질이다. 좋은 아버지로 변화하겠다고 선언하지만 아이의 성적이 괜찮을 때는 차분해지고,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폭발하는 식이다. 이처럼 변화란 갈팡질팡을 수백 수천 번 하며 긴 시간 천천히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다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팽창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보는 건 대개 임계점에서 폭발하는 어떤 장면들이다. 덕분에 우리가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 사람 변했어! 개과천선했어!” 같은 말 속에 변화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말이다(그 복잡한 과정과 심경에 대한 정보는 당사자만 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변화의 임계점에 다다르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최근 명절과 관련된 단어들을 살펴보면 유독 ‘독박’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몇 년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독박육아’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졸혼이란 말 역시 그렇다. 졸혼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전, 우리는 고령화에 따른 결혼제도의 문제에 대한 대안적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이젠 이혼이 아닌 졸혼이란 대안이 생긴 셈이다.
명절 스트레스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길
비슷한 의미에서 정서적 협박이란 말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정서적 협박이란 미국의 심리학자 수잔 포워드가 주창한 개념으로 서구 사회나 일본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어다.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라>라는 책을 보면 이 개념을 조금 더 쉽게 풀어놓았다.
“정서적 협박자는 부탁이나 위협, 압박이나 침묵 등의 직간접적 ‘협박’의 수단을 사용해 상대방이 ‘좌절감’이나 ‘죄책감’,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도록 한다. …이런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기 위해 협박자의 요구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랜 시간 반복되고 지속되면 하나의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협박자는 이 ‘무기’를 이용해 피해자를 통제하고 그의 결정과 행동을 모두 지배하려 든다. 결국 피해자는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채 자유와 능력을 모두 협박자에게 내어주고, 이 과정에서 ‘자아’는 남김없이 사라진다.”
다시 B급 며느리로 돌아오면, 며느리가 명절 참여를 거부하자 아들의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고 몸져눕는다. 화를 내고 분노한다. 며느리도 안 오는데 너도 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실은 이 실체적 행동들이 바로 정서적 협박이다.
부모님을 정서적 협박자라고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부모님뿐 아니라 친구 연인 사이에도 정서적 협박은 언제든 존재한다. 헤어지자고 말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협박하는 연인 역시 그렇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과도할 정도로 내 시간을 요구하며 우정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친구 역시 그렇다. 대개 엄마나 아빠, 연인, 절친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조종하기 위해 그들이 이용하는 건 상대의 죄책감이다. 이런 심리 구조를 잘 이해해야 지금의 죄책감과 마음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수잔 포워드의 주장이다.
10년 후의 추석에 대한 얘길 하다가 ‘정서적 협박’ 문제를 꺼낸 건, 이게 실제 미래의 추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B급 며느리에서 관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아들이 엄마와 아내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이 ‘정서적 협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해도가 낮으니 대처 방법이 미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너는 내 말을 안 듣느냐!”는 말도 실은 정서적 협박이다. 그런 말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수잔 포워드는 ‘심리적인 나만의 경계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누구에게도, 그것이 자식이라도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기 위해 죄책감을 이용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명절 노동의 분업화
현상을 규정하는 ‘언어’는 중요하다. 하나의 개념어가 등장하면 그것에 대한 찬반 토론이 벌어지고, 사회적 합의가 생기고, 그렇게 사회가 느리지만 의미 있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절은 대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갈등 구도로 치러지는 일이 많았다. 여기에 아들과 시아버지가 빠져 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이제 점점 그들이 이 구조 안에 들어오고 있다. ‘독박’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건, 이제 여성들이 자신들만으로 이루어진 노동에서 남성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제1, 2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핵심이 ‘분업’이었듯 명절 노동의 분업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돌아가신 조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가족 행사로 만들자는 측면에서 명절에 가족끼리 맛있는 걸 먹고 헤어지는 집들도 늘고 있다.
성소수자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1980년대에는 그들을 ‘변태’라 부르는 일이 많았다. 이젠 직장에서 “여자는 꽃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확실히 줄었다. 졸혼도 독박육아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였다. 하지만 이런 단어들은 분명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있다. 미래의 명절은 분명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
“주식시장은 신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복잡계로 보이는 주식시장에서조차 다양한 선행지수들이 존재한다. 모든 예측의 영역이 그렇다고 본다. 이렇듯 현상을 규정하는 새로운 개념어가 더 많이 만들어지는 순간 임계점은 폭발한다. 후세대는 명절 스트레스라는 말을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게 될 날이 올 거다. 나는 그날이 느리지만 꼭 올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안개 속을 걷는 일에 비유해 설명하곤 했다. 안개 속을 몇 시간이고 천천히 걷다 보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게 있다.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젖어 있다는 것 말이다. 변화란 쏟아지는 빗속을 걷는 게 아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는 일에 가까운 것이다.
필자 백영옥은 <스타일>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 작품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며 화제를 모았다. 이후 <아주 보통의 연애>,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 시 조찬 모임> 등의 소설집과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등의 에세이집을 냈다. 최근에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로 많은 독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현재 MBC 라디오에서 ‘라디오 디톡스 백영옥입니다’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