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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이지 내용 : 1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식도락을 빼놓고 여행을 말할 수 있을까. 여행지가 제주라면 어떨까. 미식가가 아 니어도 누구나 미식의 기쁨을 누릴 수 있 는 곳이 제주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맛 의 향연이 펼쳐진다. 흑돼지구이, 옥돔구 이, 말고기정식, 갈칫국, 몸국, 고사리해 장국, 성게미역국, 각재깃국, 보말칼국수, 고기국수, 다금바리회, 방어회, 고등어 회, 딱새우회, 꽁치김밥, 오메기떡, 당근 케이크 외에도 제주 식재료를 활용한 다 양한 요리는 제주의 맛이자 여행의 맛 그 자체다. 결국 여행은 추억으로 남고 추억 은 맛으로 기억된다. 내가 제주에 산다는 이유로 지인들이 종종 현지 맛집을 물어온다. 여행하면서 꼭 가봐야 하는 식당이나 숨겨진 맛집 같 은 걸 알려달라는 게 골자다. 그런 의뢰를 받을 때마다 나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 인다. 좋아하는 곳들을 소개할 수 있어 설레기도 하지만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는 의무감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간의 사례를 되돌아보면 맛집 소개만큼 쉽고 또 어려운 것은 없다. 같은 음식점을 두고 “거기 정말 최고더라”는 상찬도 들은 반 면에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혹평 도 돌아왔다. 굳이 맛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좋다. 제주에서 내가 좋아하는 집들은 대체로 소박하고 수수한 곳들이다. 큰맘 먹고 가야 하는 곳이 아닌, 불현듯 그 맛이 생 각 날 때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서 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춘자멸치국수’ 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노포다. 이곳의 멸 치국수는 내가 제주에서 끝까지 놓지 않 을 단 하나의 음식이다. 이른바 소울푸드 인 셈이다. 그 모양새는 무엇 하나 특별한 게 없다. 투박한 양은 냄비에 푹 삶아낸 중면과 적당한 농도의 멸치육수, 고명으 로 올린 파와 고춧가루가 전부다. 단순함 의 미학인 평양냉면만 해도 소고기로 육 수를 내야 하기에 재료비가 많이 들어간 다. 멸치국수는 사실 멸치가 전부다. 나 는 이렇게 간단한 재료로 이 정도의 맛을 내는 음식을 본 적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한없이 가벼운데 더없이 진한 맛.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마음도 푸근 해진다. 제주 시내에 있는 식당 중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곳은 ‘함흥면옥’이다. 도내 대물림 맛집으로 선정된 이 냉면집은 6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수준 높은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성격의 냉면이 건네는 묘 한 중독성은 식당 옆으로 이사가고 싶은 욕구마저 불러일으킨다. 허름한 외관이 지만 푸른 바다를 뒷마당으로 품은 곳. 구좌해안로에 인접한 ‘잠녀네집’은 녹진 하고 고소한 전복죽이 일품이다. 그간 꽤 많은 곳에서 전복죽을 먹어봤는데 여기 보다 맛있는 곳은 없었다. 또 이곳의 모듬 해산물은 조연이 아닌 당당한 주연으로 한껏 미각을 끌어올린다. 한라산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사먹었던 사발면이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는, 흔하 디흔한 인스턴트 라면이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맛은 고정 돼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여 행의 맛은, 제주의 맛은 특정인의 향유물 이 아닌 모든 여행자에게 열려 있는 특권 이다. 제주의 맛  우희덕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 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춘자멸치국수’의 멸치국수. 무엇 하나 특별한 것 없는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가장특별하다.│우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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