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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이지 내용 : 1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어떤 하루 슬며시 커튼을 젖히자 투명한 빛이 창 안 으로 스며든다. 빛이 공간을 채우면 온도 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깃든다. 마음이 열린다. 맑고 포근한 날의 제주와 비가 오고 흐린 날의 제주는 서로 다른 곳이다. 다른 장르다. 둘 중 하나를 선택 하라면 두말 할 것 없이 전자다. 그것은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 푸른 바다와 검 은 바다, 제주 해물라면과 그냥 라면 이 상의 차이다. 제주에서 일주일 내내 흐리 거나 비오는 날씨를 경험하면, 그런 환경 에 혼자 있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다만 삶을 노래하기보다 비관하기 쉽다. 줄곧 흐리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하루 종 일 맑은 날은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 날은 특별하다. 실상 어제와 똑같 은 하루일 뿐인데 특별한 하루가 주어졌 다고 생각한다. 집에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날.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일 단 어디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그런 날이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현관문 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곳이 제주라면, 내 앞에 펼쳐지는 곳이 모두 제주라면 나가 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획 없이 나왔다고 해서 후회할 일은 없다. 조금 헤맬 뿐이다. 일단 떠나는 게 더 중요하다. 힘든 여행은 있어도 후회하 는 여행은 없다. 미션을 수행하듯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할 이유도 없다. 여행은 경쟁이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도 아니다. 천천히, 꾸준히 쌓아가는 여 행의 마일리지는 소멸하지 않는다. 멀리 떠나거나 관광지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관광지가 아니어도 여행할 곳은 많다. 이 를테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마을을 둘 러보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 된다. 어느새 나는 한경면 고산리 마을을 걷는다. 단 층 위주의 아기자기한 집들과 상점, 식당 이 정겹다. 번잡하지 않고 평화롭다. 학 교 앞 떡볶이를 재현했다는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사인볼 회전간판 이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다. 볕 좋은 날 포구에 줄줄이 널어놓은 오징어도 몇 마 리 산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라고 여기며 지나쳤 을 때는 느끼지 못했다. 이곳이 이런 곳 이었는지,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특히 자구내입구 사거리에 서 자구내포구로 이어지는 노을해안로. 환상적인 꽃길을 자랑하는 녹산로나 중 산간 지역을 시원하게 관통하는 산록남 로보다 나은 건 그 이름뿐일지도 모른다. 수월봉 지질트레일이나 당산봉, 차귀도 를 가기 위한 관문 정도인지도 모른다. 하 지만 노을해안로 주변에 펼쳐지는 탁 트 인 평야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개방감을 선사한다. 끝없이 밭이 넓어 더없이 하늘 이 높다. 맑은 날 빛을 발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질료들이 특별한 풍경을 만든다. 그 풍경이 아무것도 아닌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 여행이 아무 것도 아닌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 아무 것도 아닌 일상에 어떤 하루를 건넨다.  우희덕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 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제주 고산리 노을 해안로에서 바라 본풍경│우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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